슈 x 히로키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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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미너식단을 생각하며 저녁식단을 확인했다.
"저녁에 단백질이.. 두부에.."
저녁에 왜 두부구이따위를 먹는거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분주함에 끼어들어서 물었다.
"혹시, 저녁식단 스태미너 식단은 없어요?"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더니 영양사는 저녁은 무겁지 않게 먹는다며 두부도 충분한 스태미너 식이라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한창 성장기에 붙어야 될 뼈도 많은 애 한테 이건 좀 그렇다며 스테이크나 햄버거 뭐 그런거 없냐고 했더니 냉동실에 있는 고기로, 소고기 불고기, 김치&돼지고기조림, 닭고기 채소볶음을 해주겠다고 했다. 너무 고기인가? 싶지만.. 당근이나 피망을 피해달라니 양배추와 양파를 곱게 갈아서 보이지 않게 쓰고 버섯도 작게 썰어 고기에 묻히게 넣어놨다. 채소가 많이 들었지만 채소가 보이지 않는 그런 고기반찬만 산만큼 쌓아서 챙겨갔다.
내가 이만큼 신경 써주는 걸 알아줄까? 뭐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내가 너무 괴롭히고 있는 걸 스스로도 알 정도니.. 잘해줘야지 하면서도 그 귀여운 반응을 보면 괴롭히고 싶은 이 가학본능은 어쩔 수 없나보다.
고기반찬 많이 먹고 건강한 모습을... 아니 거기만 건강한 것도 좋지만...
색정스러운 생각만 가득한 머리를 가로 흔들며 비우려고 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기분좋아하던 히로시의 에로틱한 얼굴이 하반신에 힘을 주게 만들었다.
"밥주러 가는데 이러고 가면 큰일나겠군."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들키진 않지만 아랫도리가 빵빵하면 아무래도 이상한 놈 취급하는데 더 미친놈 취급할테니.. 일단 식사가 만들어지기 전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미 예쁜 손을 빌려 한 발 뺀 상태인데 그 귀여운 표정이 머릿속을 장악해서 이 나이에 셀프 서비스를 두 번이나 할 줄이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허무한 자위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봤다.
"내가 봐도 변태의사네."
기분나쁜 비웃는 얼굴을 보고 거울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 면상은 내가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질 않아서 괜찮다는 위로를 하면서 아버지 닮은 얼굴 따위 자주 보고 싶지 않았다.
'지 애비 똑 닮아서는...'
혀를차며 항상 듣던 그 기분나쁜 소리는 엄마가 날 볼 때마다 하는 소리였다. 계약결혼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래도 결혼을 했고, 사랑은 없었지만 질투는 있었나보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나는 그저 '병원을 이을 DNA의 일부' 이지만 그 DNA의 일부가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게 기분 나빴는지, 계약결혼이지만 아버지가 여러 여자들을 휘두르며 정작 본처인 어머니는 거들떠도 안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쇼윈도 부부의 아들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존재. 없어지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할머니가 날 아들 똑 닮은 이쁜 손자 일지도 모른다.
거울을 보면서 그런 울쩍한 생각이 들어서 아까까지의 히로키를 생각하며 자위했던 것과는 기분이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상태지만, 히로키를 보면 기분이 좀 좋이지지 않을까? 하고 위로해본다.
식당을 다시들러서 스태미너 식단으로 만들어진 식사를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 왔어...?"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창문도 닫고 갔는데 추웠었나? 걱정이 되지만, 함부러 건들였다가는 물겠지? 그래도 반겨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고기 좋아한대서 많이 받아왔지"
사실 고기 많이 받아왔다기 보단 반찬이 전부 고기반찬인데.. 병원밥 먹어본 적 있어서 이상하다고 느끼려나? 그냥 몰랐으면 좋겠다..
"어.....? 어.. 고마워.."
둘이 앉아서 말도 없이 주는 밥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불만도 불평도 아무것도 없이 식사는 끝났다. 혹시나 해서, 찔러보는 말을 건냈다.
"저기..."
"왜"
놀란듯 한데 놀라지 않고 덤덤한 척 말했다. 목소리 갈라졌다, 히로키. 쿡 귀여워.
"밤에.. 자러, 와도 되?"
말없이 짜증스럽게 쳐다보더니
"뭔 개소리야??"
귀엽다. 욕 하는데 왜이렇게 귀엽지? 밥은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싫어한다고 입으로만 말하고 표정이랑 분위기는 전혀 아닌데? 와서 자도 되지만 나는 허락따위 한 적 없어라고 하는게..
"VVIP룸이 편해서...."
거짓말 하는 게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들킨것 같았다. 바로 나랑 상관 없는 일이잖아? 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당직하는데 당직실에 아무래도 2층침대고, 코고는 사람도 있고, 침대도 좀 딱딱하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데 그런말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렇다고해서 아예 거부하는 것도 아닌게 밥은 잘 받아 먹고 눈빛도 아까보단 좀 나아 보였다.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 눈은 날 보고 있었으니까. 와도 된다는 거겠지?
"아니야. 자는데 불편할거니까. 그냥 당직실에서 잘게."
안심하라는 말을 건내니 째려보던 눈에서 힘이 좀 풀린 듯 했다. 늦게와서 자는 걸 덮쳐야지. 푹 자면 괜찮겠지? 모르겠지?
"다 먹었으니까 갖고갈게. 창문 잠깐만 열어둘게"
"...."
대답도 없었다. 고개는 내쪽을 향해있지 않다. 창문을 보고 있었지만 창문에 비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치보는건가?
식판을 갖다놓고 너스 스테이션 안쪽에서 잠깐 졸았는데 악몽 한 편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너 같은 건 죽어야되!!!! 너만 없었어도...'
식판을 들고 나오면서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변기물에 빠진 내 작은 머리는 저항도 못하고 허우적 거리고 있고, 엄마는 그렇게 날 죽이고 있었다.
내가 생겨서 의사의 길을 중단하고, 그리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 처럼 보이게 꾸몄다. 그리고 출산 전부터 바람피던 아버지, 당연히 태어난 아이따위엔 관심도 없었고 아내인 엄마에게도 무관심했다. 남들앞에서만 잘 보이면 되는 그런 부부니까.
엄마는 나를 가지고 좋은 줄을 잡게 된거고, 아버지는 귀따갑게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했던 그 일이 정리되어서 좋은 관계일 뿐, 사랑은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나에대한 이상한 집착만 늘어갈 뿐, 산후 우울증으로 인한 아동학대가 빈번히 일어났지만 쉬쉬했다. 정작 당한 나는 이렇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지만.. 이해하지만, 동감할 순 없었다. 내 마음은 그 어린시절에 남아있고, 그래서 어른이 된 이후의 꼼수만 들어갈 뿐.
"나 따위... 낳지 않았어도 됐잖아"
아무도 안들리게 혼자서 입만 뻥끗거렸다. 죽이고 싶었지만 죽었다면 엄마는 이혼했겠지. 아니 이혼당했을꺼다. 필요없는 존재니까. 아버지에게 필요한 존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할아버지에게 필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냥 '의사 집안의 의사 며느리'라는 허울좋은 타이틀. 하지만 아들 낳아주지 않은 며느리 따위 필요도 없을테니. 그래서 엄마가 날 죽지 않을만큼만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쓰레기네. 재활용 쓰레기? 큭"
엄마에게 죽지 않을만큼 괴롭힘 당하는 트라우마 시리즈로 베란다에 얹혀져있었다거나, 변기물에 머리를 쳐박힌 일이라거나, 포크로 찔린다거나, 비닐봉투로 머리를 묶인 일이라거나, 멱살 잡혀서 엄마랑 같은 눈높이에서 봤던 일이라거나, 뭐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쳐맞은 일이라거나..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 정말 죽지도 않고 끈질긴 생명력이네... 대단하다, 나새끼.
새벽부터 트라우마 스페셜로 자존감이 바닥치고 있었다. 출근할 필요도 없지만 히로키가 보고 싶었다. 펠라치오한 뒤부터 서먹한 사이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고 있었다. 남자한테 당한 일이니 당연한건가? 기분나쁘겠지..
이제 자려나? 싶어서 시각을 보니 새벽 5시를 지나고 있었다. 자겠지? 히로키 방의 불은 간호사가 소등했는지 캄캄했다. 복도에도 불을 하나 꺼둬서 반만 밝았고, 너스스테이션 불은 당연히 밝았다.
"슈 선생님, 퇴근 안하세요?"
"네. 퇴근 안해요. 이제부터 재밌는 거 할꺼거든요."
내 아끼는 사탕군을 핥으러 갈꺼거든요. 밤손님이요. 음... 이름을 붙이자면, 인큐버스 려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충분히 깊은 수면을 취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셔츠를 벗기니 흰 피부가 바깥 빛에 반사되서 하얗게 더 선정적이게 보였다. 그 피부에 쪽쪽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사이에 도드라지는 곳은 가슴봉우리였다. 물론 남자라서 봉긋하게 솟은 게 아닌 그저 꼭지만 살짝 설까말까한 곳이지만 충분히 귀엽게 올라와있었다. 있으나 없으나 한 그 존재는 자신이 여기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고, 꼿꼿하고 주변보다 조금 더 딱딱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렇게 화산처럼 올라오는 걸 입안에 굴리면서 쪽 소리나게 빨아올려보았다. 목 안에서 올라오는 신음은 내가 자극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불편한듯 뒤척이지만 움직이기 힘들고,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기에 더더욱 괴롭히기 쉬웠다.
너는 날 좋아해야지. 당연히, 좋아해줄꺼지? 미워하지 않을꺼지? 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으면서 이런짓을 하면 당연히 누구라도 남자라면 싫어할 짓인 걸 알면서도 하고 있었다. 손으로 바지를 건들이면서 침대에 걸터앉아 히로키의 왼손을 빌렸다. 점심때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펠라치오가 아니라 딥키스를 하며 자신의 중심은 그의 손에, 그의 중심은 자신의 손으로 쓰다듬으며 '흐음..' 하고 서로 신음을 내뱉고 있던 그 순간,
히로키의 눈이 번뜩하고 뜨였다.
그 입속에 들어가 입안을, 혀를 먹을 듯이 빨아당기고 있었는데 그 혀에서 반항하는 감각, 그가 일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었다.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확 밀치더니 버럭 소리쳤다.
"이 변태새끼는 아침부터 키스질이야!!!"
좋아, 하는거지? 날 좋아하는 거잖아?
상의는 벗겨져있고, 키스마크 투성이에 유두도 이미 쪽쪽 빨려서 화나있었다. 바지는 내려져서 페니스는 서있다가 이 상황에 착 줄어들었지만 누가봐도 내가 이모양으로 만들어놨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씨... 꺼져!!!!"
눈은 있는데로 독한 빛을 품고 있었고, 싫다는 말도 못알아 쳐먹냐? 지금 이 꼴은 뭐하는 짓이냐? 놀란 눈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혔는지 제대로 말도 못했다.
"미안..."
"개새끼야!!!!! 내가 좋아? 좋냐고? 씨발... 반했냐? 나한테?"
"어?? 응... 미안..."
미안하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말 뿐이었다. 더 뭐라고 말하기도 싫은 눈치였고, 왼손으로 가리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내 손은 빌리고 싶지 않겠지. 혼자서 바지는 올릴 수 있지만 붉은 자국이 난 자기 배때기를 보더니 씩씩 거리더니 옷을 잠그진 못해서인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나가!!!!!! 다신 오지마!!!!!!!! 이 개자식아!!!!!!! 변태새끼야!!!!!!!!"
"응.. 미안.. 퇴근, 할게. 오늘은... 안올꺼야"
방에 들어갈 땐 티나지 않는 범위에서 할 생각이었다. 조금 만져보고 쓰다듬고, 좀 핥아볼 생각이었다. 키스하고, 애무하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분명 아니었다. 내가 너무 심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미워할 일인가 고민을 하면서도 자신이 용서되지 않았다. 당연히 싫어하겠지. 어제 그렇게 펠라를 하고 서먹한 분위기였는데. 그런데도 손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스 스테이션 안쪽에서 엎어져서 아무생각 없이 있다가 밥을 챙겨줘야 겠어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안줘도 간호사들이 주겠지. 그래도 병원밥 메뉴를 보고 한숨쉬었다.
아침엔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식판을 가지고 가기도 민망할 정도로 식단의 차이가 엄청났다. 아무리 그래도 고기한 점 없는 식판이라니.. 단백질은 두부와 생선으로 구성된 이 몹쓸식단은 나도 먹기 싫은데.. 계란이라도 구워가야지 싶어서 영양사에게 말을 했더니 급하게 소고기를 구워줬다. 다행이다. 그래도 고기반찬 해갈 수 있어서.
보고싶지 않겠지. 내가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으로 있어도 내가 주는 밥은 안먹을꺼야. 식판에 고기를 받아왔지만 내가 들고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맞겼다.
갖고 들어간 간호사는 들고 나오면서 투덜거렸지만 그냥 간호사들이 흔히하는 불만이려니 생각했다. 근데 스테이션에 앉아서 하는 이야기를 귀를 세워 듣고 있었다. 맞겨는 놨지만 신경쓰였다. 날 좋아하긴 글렀네. 그런거겠지. 안쪽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자해를 하고 있었다. 엄마도 날 미워하는데 타인이 날 좋아해줄리가 없지. 간호사들이 저러는 건 내가 병원장 조카고 의료재단 이사장의 아들이라서 그런거지. 그냥 나 자체를 좋아해줄 사람은 이 세상엔 없겠지. 원래도 그랬으니까. 할머니는 아버지의 아들인 손자라서 예뻐해주는 거고. 엄마도 의료재단 이사장의 아들의 아들을 낳아서 대접받으려고 날 살려두는 거고. 눈 앞이 흐릿해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오랜만에 우는건가...
"슈 쌤..."
"과장님... 힘드시면 댁에 가셔서 주무세요."
"일 하시는데 죄송해요."
눈물을 닦아내고 일어났다. 세상이 빙글 도는 것 같았지만 옆에서 부축해줬다. 큭. 미친 쓰레기놈. 사랑따위 한답시고 한 짓이 그런짓이냐. 남자새끼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거부감이 들 일인데, 추행부터 하고... 미친거야..
"빈 병실이라도 가 계실래요?"
"아니에요. 저 신경쓰지 말고 마에다군 좀 잘 봐주세요. 전 퇴근할게요."
그렇게 도망치듯 퇴근해서 오피스텔에 누웠다.
잠이 든 듯 했는데 무슨 꿈을 꾼 듯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히로키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만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일은 내가 다 저질러 놓고 아무것도 수습할 수 없었다.
미친놈. 개자식. 틀린말이 아니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그런 엉망인 모습으로 119에 실려왔을 때 부터 운명처럼 느껴진 그 사랑의 시작은 모른척 하려고 해도 손이 먼저 움직였고, 욕심이 났다.
만났을 때 부터 수술하고 회복실에서 키스한 것, 그리고 병실로 옮겨서도 키스하고 만지작 거린거, 밥 먹인 거 대화한 거, 펠라하면서 가는 얼굴, 그리고 마지막에 키스하고 그 상황에 경멸하는 그 눈빛에 나가라고 소리치는 모습까지...
잊고 싶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 따위 보다 이 눈물이 다 흘러내리고 나면 그 모든 기억이 지워졌으면 좋겠다. 만나기 전의 이전의 나로 리셋하고 싶었다. 상냥하게 부드럽게 대한다기 보단 그냥 잊어줬으면 나라는 존재를,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냥 보기만 할게. 건들지 않을게 라는 맹세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모르는 존재로 만나지 않은 상태로 되돌려놓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렇게 힘들진 않아도 되니까.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런전화 안받아도 되는데. 몇번이고 거절한 것 같았다. 세 번 정도 거절한 것 같고. 다섯번째 울릴 때 그친 눈물이 다시 흘렀다. 병원에서 전화오던게 끊기고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가 돌아가면서 오기 시작했다. 병동 간호사들이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거겠지. 안볼꺼니까 안받으면 되는거다.
좀.... 쉬다 보면 나아지겠지. 어릴때도 그래왔으니까. 엄마한테 좀 미움받는다고 해도 금방 나아졌으니까. 엄마는 매일 보면서도 괜찮았으니까. 히로키만 피하면... 이름으로도 부르지 말아야지. 그 애만 잊으면... 괜찮겠지... 미움받지 않아도 되는거니까. 만나지 않으면 미움받을 일도 없지.
죽고싶다. 나새끼. 왜 태어났냐. 뭐, 엄마의 적절한 도구이니 일단은 살아있어야지. 내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은 없겠지만 엄마가 피해를 보잖아. 엄마는 그렇게 날 미워하는데, 난 왜 엄마가 좋은거지. 히로키가 날 그렇게 싫어하는데 난 왜 히로키가 좋은거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난 아마도 기절한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