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랄까. BBS오프모임이랄까.. 그런곳에 가게 됐는데 물론 내가 돈이 많다거나 그런걸 아는 건 아니고. 뭐 쨌든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갔는데, 정확한 장소를 몰라서 그 주변에 어물쩡거리고 있었는데 꽤 귀여운 사람이 뒤를 돌아본거야. 그 사람이랑 눈을 딱 마주쳤고. 그냥 길 가는 사람이었는데 아 귀엽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임장소를 갔더니 떡하니 있더라고. 근데 그 모임에서의 내 인상이 별로였는지 계속 그 사람은 주최자 뒤에 숨기만 했었어.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었고, 그래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한가했었던 것도 있고 개개인에게 같은 연락을 했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에게선. 시간떼우기용으로 적당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걸 낚아챈개 나랄까?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가까워지고 자주만나고 그랬는데 상대가 대입준비며 뭐 그런걸로 소원해졌달까. 나는 당연히 어려움없이 입학했는데 그 사람은 목표했던 학교 말고 다른곳에 붙어서 재수를 한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좋아졌는지도 잘 모르겠고, 왜 싫어진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계속 내 뇌에선 이 사람이 첫사랑이고 그립기도 하고.. 만나기 싫기도 한 그런 사람.
잠에서 깨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내 옆에 누군가 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착각, 꿈이 너무 현실이어서 그랬던건지, 현실이 꿈같아서 그런건지. 침대엔 혼자였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읏.."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을 때, 허리며 뱃속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은 어제의 밤에 현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휴지통 주변에 대충 버려진 콘돔이며, 콘돔이 분명 있는데도 생리통같은 알 수 없는 복통. 그리고 근육통.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어디선가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에서 전달되는 진동에 알 수 없는 흥분상태로 빠졌다.
"타치바나 입니다."
누구의 전화인지도 확인조차 않고 바로 받아버리는 건 나쁜 습관이겠지만 병원에서 급히 찾는 전화인 경우가 더 많아서 그냥 받아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쌤, 일어났어?"
"어, 응.."
누구 목소리인지 알 법도 같은데 모르는 거 같은 이 상황,
"아침까지 괴롭혀서 미안. 깼을 때 아무도 없는거.. 좀 그래서 전화했어."
멍한 아침에 이게 무슨소리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아.. 응.. 괜찮아."
괜찮다고 말은 하면서 지금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쌤, 진짜 괜찮아? 수업 째면 혼내니까 먼저 나오긴 했는데, 다시 집으로 가?"
낯설다. 이 낯선 광경에 어디서 언제 어떻게 말도 안되는 구분을 지으며 가정을 세워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정해진 답이 있었다.
"....쌤?"
그래도 날 부르는 게 따뜻한게 너무 좋다. 계속 듣고 있고 싶다.
"쌤, 괜찮아?"
"응.. 괜찮아."
전화너머로 보이지도 않을텐데 싱긋 웃어보였다. 괜찮은 상황인가? 내가 방금 전까지 남자랑 뒤엉켜 누워있었는데, 그게 너고, 네가 나한테 넣는 그런 상황이라는 거?
"안되겠다. 쌤, 수업째서 싫어하겠지만 집으로 갈게. 욕을 하든 때리든 맘데로 하고, 일단 집에서 보자. 끊어."
좀 더,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급하게 전화를 끊고 이쪽으로 오려는 모양이다. 침대에 대충 널부러져 누웠다. 아직 침구에 그 아이 체취가 남아 있었다.
"히로..."
목소리도, 체격도, 얼굴도 어른이 된 히로였다. 날 안고 있던 그 다부진 팔도, 키스를 하는 젖살빠진 그 얼굴도. 강하게 밀어 부치던 힘에 부서질 듯 끌어안고 흔들어대던 그 밤의 기억이 밤이 아니고 오늘 아침이었고, 아침까지 침대에 있다가 학교를 간 것 같다. 히로가 그만큼 컸다는 건 몇년이 지난걸까. 아니면 그냥 지금 내가 그저 꿈을 꾸고 있는건가.
금방이라도 올 것 처럼 말을 해서 전화를 끊어놓고, 몇 분 안지난듯 했지만 히로가 그립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일어나고 싶지만 손가락 까딱 하고 싶지 않았다. 베개를 베고 잤는지 베개에서 히로냄새가 잔뜩났다. 베개에 코를 박고, 지난 밤도 아닌 오늘 아침의 생생함이, 내 손으로 나를 쓰다듬으면서 히로를 그리워했다. 일어나기 싫은 게으른 손이 몸을 훑으며 그를 상기시켰다. 여길 이렇게 쓰다듬고, 저길 이렇게 쓰다듬으면 그가 나를 만지던 그 손길이..
"....히로...키...."
가슴께에도 손을 가져와 부비적댔다. 중심부에 손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몸은 금방 달궈졌다. 따뜻한 그 아이의 손은 차가운 어른의 손이 되었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차가운 손이 헤집는 몸은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그 손을 내 손으로 재현하려고 보니 그리 쉽지 않았다. 가슴돌기 주변을 맴돌던 손은 여기는 더이상 재미가 없어서 엉덩이로 옮겨졌다. 내 손인데도 언제부터 엉덩이를 쓰다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익숙치 않은 그 안쪽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느끼게 되었는지. 지금의 내 포지션은 어느 새 그 아이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몸이 되어서인지 가슴을 깨물리는 상상보다는 허벅지를 깨물리는 상상이 더 희열감이 컸다.
"흐응..."
소리를 올려보지만 내 손과 내 목소리에 나 혼자 흥분하기엔 조금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자위도 못하는 바보가 된 거는 틀림이 없었다.
"쌤!"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리면서 차가움이 밀려왔다. 후다닥 뛰쳐들어온 그의 부름에 부르르 무언갈 느끼기 시작하는 내 몸은 그를 재촉했다.
"히로..."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든건지 기절을 한건지 모르겠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흔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꿈을 꿨겠지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신다.
무슨 꿈이었을까.
그저 꿈인걸까.
그런꿈을 꾸고 다시 진료를 보고 수술을 하고 점심이며 저녁배달을 하고 전화도 받았다.
"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목소리보다 조금 높았다. 남성의 성대는 변성기 이후로 목소리가 그리 달라지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쌤?"
"어, 응.."
"바빠요? 방해되는 거면 전화 끊을게요."
"아, 아니. 무슨 얘기중이었지?"
히로와 전화중인데 딴남자 생각이라니. 아니 딴남자는 아니지 그것도 히로니까. 언젠가 먼 미래의 히로, 아니 내가 만들어낸 망상속의 히로키인가.
외출준비를 하며 환자복 입고 나가긴 좀 그런가? 싶어서 집에 가봤다. 어릴 때 입던 옷이 나올까 싶어서 찾아봤지만 전부 지금 입는 옷들 뿐이었다. 걔중에 좀 작았던 옷을 한 벌 갖고 히로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내 옷 입을래?"
게임기를 내려두고 날 본다.
"쌤 옷? ...그냥 이거 입을래."
"환자복 입고 밖에 돌아다니게?"
들고 있는 옷을 보더니 환자복 상의를 만지며 옷을 내려다본다. 몇번이나 세탁한 색바랜옷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환자복은 눈에띈다.
"뭐 어때, 괜찮아."
"엄청 눈에 띌건데? 뭐.. 괜찮으면 말고."
"...어떻게 가게?"
"내 차 타고. 내려서 백화점까지 한 10분? 정도는 걸어가야 되는데, 이거 입을래?"
여름용 가디건을 챙기긴 했지만 지금은 한 여름이고, 밖은 매우 더웠다. 환자다 보니 좀 더운걸로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 가디건을 건냈더니 받아들었다.
"....고마워."
"아, 더울려나.."
내 옷을 안입는다는 의미는 아닌 거 같으니..
"괜찮아. 에어컨 틀어줘."
"내가 말하는 건 밖에 돌아다니면 더울건데.. 아무리 여름 가디건이라지만.."
환자복은 위생적인 면이 있지만 그리 바깥환경에 대해서 쾌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병원 안에 있으면 시스템 에어컨에 잘 조성된 환경이라 괜찮지만.. 머뭇거리며 가디건을 입더니,
"뭐, 오래 걷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말한다.
"....계속 병원안에 있어서 모르나본데.. 밖, 많이 더워. 30도야."
챙겨온 반팔과 반바지를 건낸다. 건낸 옷을 힐끔 보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알았어."
갖고있던 옷을 낚아채던지, 병실에서 날 내보내면 될 일을 옷을 갖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풉.. 귀엽네"
반바지라고 집어온 바지는 왜때문인지 칠부가 되어있고, 상의셔츠는 아빠셔츠가 되어 있었다.
"쌤.. 쌤이 커서 그렇잖아."
"나 그리 큰 편은 아닌데.."
얼굴이 빨개져서 호소하는 그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난 큰편이 아니라고 발뺌해봤자 일본남자가 180넘는 상황에서 큰 편이 아니라니.. 음..
"나.. 나보다는 크잖아. 그리고... 곧 클거야..."
큰소리를 치다가 목소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아진다. 그래, 쑥쑥 커야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쑥쑥 커야 될건데"
"놀리냐. 당신보다 클거야."
궁시렁 거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그래, 얼른 가야겠다. 바지 흘러내리진 않아?"
"그정도는 아냐. 빠.. 빨리가자!"
"그래."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게 더 귀여웠다. 손을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같으면 싫다고 손을 빼거나 뿌리칠 것 같은데 조용히 잡혀있다. 싫지 않은 거겠지? 놀란 표정이라 손 잡은게 불편한건지 안색을 살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어서 아랫쪽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그게 더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다.
"응? 왜 그래?"
"아.. 아냐."
"그래? 갑자기 외출해서 긴장 한건가 싶어서. 아프면 얘기해."
"아.. 알았어."
맞잡은 손은 애기라서 그런지 체온이 높아서 그런지 따뜻했다. 내 손이 찬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따스함이 전해지는 게 너무 좋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주차장에서 내 차를 찾아서 탈려고 그 앞에 섰을 때, 이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상실감에 멍하니 서 있었다. 놓기 싫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찰라에 손을 놓고 왼켠에 선 히로를 봤다.
"풉"
"이쪽이 운전석이네?!"
보통 운전석이 오른편에 있지만 왼편에 있는 걸 보고 역시 남자애다보니 이런 차에 흥분하며 좋아하는 게 보였다.
"아, 응. 독일에서 타던거 그대로 들여와서."
"독일에서 살았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할머니가 외국인이라는 얘기까지 하면 큰일이라도 나겠네.
"응. 잠깐. 에.. 의학연수?"
부러움과 신기함과.. 뭐라고 표현해야될지 모르는 고양감? 귀엽다. 눈 앞에 케이크 쇼케이스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와아, 혼자?"
"어, 응.. 혼자"
"와아.. 좋았겠다."
"글쎄.. 잘 모르겠어."
"왜? 혼자 살면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잖아."
히로는 아마도 집안의 간섭이 제일 귀찮은 모양이다. 나도 그런때가 있었나.. 하고 고민해보지만 그런적이 없었다. 우리집은 방임주의니까. 무슨일을 해도 혼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란 존재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혼자사는데?"
"...부럽다."
부럽다는 얼굴을 하며 입에서 부럽다 하고 나와버렸다.
"같이 살래?"
"내.. 내가 왜 같이 살아!!"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냥 건낸 말이지만 히로의 반응은 역시 귀여워.
"가.. 가자.."
차 앞에서 한참 얘기 하다가 드디어 차 안에 들어왔다. 싱글거리며 운전을 하는데 시선이 엄청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차 내부를 둘러보는 눈빛이며, 운전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야? 반한거야?
"왜 그래?"
장난스레 말을 건냈다. 아직 '같이 살래?'라는 말에 반응한 자신이 부끄러운건지,
"아! 그냥. 신기해서.. 구경한거야."
라고 둘러댄다.
"차가? 별로 특별할 거 없는데.."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것도 신기하고. 맨날 이거 타고 먹을 거 사러 갔엇어?"
"응. 반대쪽에 있으면 운전하기 불편해서."
물론 도로법도 좀 달라서 운전하기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도로폭이 좁다. 한참을 물끄러미 신기한듯 쳐다보길래 싱긋하고 웃어보였다. 사실 이 차 말고 다른차도 많이 있다는 건 당분간 비밀에 부쳐둬야 겠다. 정체구간에 정체도 없어서 예상시간대로 도착했다.
"다왔네."
주차장에 들어가서 빙글빙글 돌며 주차할 곳을 찾았다. 주차를 하고 내리려고 보니 뭘 신기한 게 있는지 두리번 거리며 벨트를 풀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손을 낚아챘다.
"헤메면 안된다. 눈에 띄긴 하지만."
이세탄 주차장에서 내려서 마루이 아넥스까지 걷는데 대략 20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환자복이 아니긴 하지만 옷이 아무래도 큰 편이랄까. 패셔너블 하다고 하면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 손 잡아놓고 어떻게 헤메."
손 잡은 게 불만은 아닌 듯.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가볍게
"그래"
라고 흘려들었다. 한여름의 아스팔트 거리, 그림자 없는 직사광선의 한 여름의 더위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도 히로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내 손의 차가움을 녹여줬다.
"저기다!"
".....저기가?"
"응."
건물 아웃테리어보다 아무래도 내부에 들어갔을 때의 화려함은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패션관련 편집샵들이 부분 부분 위치를 하고있는 중에 1층은 모자며 악세사리류가 주류였다. 히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이었다.
"유니클로 가는 거 아니었어?"
"유니클로? 그게 어딘데?"
"여기저기. 체인점이라서.. 여긴 너무 비싸잖아."
"비싸? 그런거 신경써?"
입고있는 셔츠가 얼마인지 비밀에 부쳐둬야 될 것 같은데...
"..... 나는 쌤이 간단한거 사줄 줄 알았는데.."
"간단하달까.. 그냥 내가 입고 싶은데 못입는거 사주고 싶어서, 엘리베이터 저쪽이다~"
손 잡고 끌고갔다. 엘리베이터에 둘이서 두근거리며 데려갔다. 내 기대에 반하는 표정의 히로가 보였다. 부담스럽다는 게 얼굴에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옷들이 보이니 놀란 표정이다. 다른 가게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둘러보지만 그리 넓지않은 작은 관이라 한바퀴 휙 돌아서 다시 내쪽으로 돌아왔다.
"여기, 이거."
".......이거?"
인터넷으로 둘러보다가 어쩌다 보게 된 귀여운 옷이라 히로 생각하면서 선물로 사둘까 하던 옷이었다. 세일러 셔츠에 리본, 그리고 호박바지에 서스팬더까지 완벽한 귀여움이었다.
"응 이거! 귀여운데! 나한테 안맞아."
".....코스프레냐"
"아니 생활복"
내 눈치를 한껏 보다가
"귀엽기는 한데, 나랑 안 어울려."
거절했다.
"아니야! 어울려! .....입어봐주면 안되?"
"어딜봐서 어울리냐!!!"
싫은가보다. 싫다는데 강요할 순 없지.
"싫으면 말고."
"좀 더 무난한 거 없어?"
"무난한거.. 음.. 이게 그나마 무난한 쪽인데.."
반바지에 세일러 칼라, 서스펜더 조합이 귀여워서 히로가 입어줬으면 좋겠어서 데리고 왔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왜 여자애옷을 입힐 생각이냐?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몇마디 궁시렁 거렸더니 눈치를 살피더니 주저하다가 입을연다.
"내가 입기엔 너무... 귀엽, 잖아."
"히로도 귀여워!!"
"미쳤냐!!!!!!"
"귀여운데..."
당연히 귀여우니까 귀여운 옷을 입히려는 거지!! 라고 하고 싶은데 그 말을 제대로 못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싫은건지,
"...노.. 놀리지마!!"
하고 소리친다.
"따.. 딴거. 딴거..."
"딴거?"
"딴거."
원래 여성복 코너 중에 유니섹스인 남성복인 터라 남자애가 입을만한 옷은 그다지 없는편이다. 원피스를 입어주면 더 귀엽겠지만 그렇게까지 여장을 강요할 생각은 없고, 그냥 반바지에 세일러...
"꼭, 이거 입어야 해?"
미니헷까지 써주면 완벽하게 귀엽겠지만 반바지엔 거부감이 없고, 세일러 칼라가 너무 귀여운건가...
"싫으면.. 말고.."
아무리 뒤적여봐도 저거만큼 무난한 옷은 없고, 귀여운 옷도 없고, 입어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정도 옷에..
"유니클로가 어딘데."
"화났어?"
"아니,"
"....화났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유니클로 옷이면 되는거지?"
"어."
"그게 어딘데?"
"이 근처에."
"뭐야? 너도 몰라?"
"...나라고 유니클로 매장이 어디인지 다 아는 줄 아냐?"
할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유니클로 라고 검색하니 신주쿠 역 근처에 매장이 있는듯 보였다. 여기옷은 별로고 처음부터 유니클로 옷을 원했으니 그리로 데리고 갔다. 여유없는 걸음걸이로 끌고가듯이 유니클로 매장으로 왔다.
"....쌤.... 그...."
"여기네."
짜증과 울컥함이 눈물이라도 날까봐 애써 참아본다.
"맘에드는 걸로 골라와."
매장을 둘러볼 생각도 없이, 입구 한 켠에 있는 결재카운터 앞에서 옷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다. 잠깐 기다리기 금새 가져왔다.
"이거면 되?"
"어."
바로 계산하고 옷을 건낸다. 계산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깔끔한 흰색 티셔츠에 적당한 면바지를 입고오니 별거 아닌데 기분이 풀렸다.
"배, 고파?"
"어."
"바로, 고기 먹으러, 갈까?"
괜시리 화난게 미안해서 사과할 마음으로 카페를 갈려고 먼저 물었다. 배고파서 고기 먹고 싶다면 먼저 고기 먹으러 가고, 아니면 카페가서 케이크 한 점 사주고 싶었다.
"잠깐, 어디 좀 들르면.."
"가고 싶은 데 있어?"
"어, 응.. 들려도 되?"
"그래."
아까와는 다르게 히로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데려간다. 여기 였던거 같은데..
"딸기가 없네.."
딸기가 없다는 말에 점원이 다음달에 여름딸기가 나온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딸기케이크가 없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생일 케이크 예약 되죠?"
물론이죠 라고 대답한다. 히로 케이크 여기서 예약 하고, 또.. 초코 있는데 초코는 싫으려나..
"맘에 드는 거 없어? 딸기 말고는 안먹어? 초코도 있고.."
"아니 초코도 좋아."
"마실꺼는?"
"이거...."
부끄러워하며 복숭아주스를 가리킨다.
"....초코 케이크, 복숭아주스, 다즐링... 케이크 다른 거 더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
"... 풉...."
초코 케이크에 복숭아주스, 그리고 고기. 인가.. 단순함에 너무 귀여워서 카운터 앞에서 배잡고 웃었다. 너무 귀여운 내 히로..
"고기는 나중에 사줄게. 여기서 파는걸로."
무의식적으로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 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 실수가 부끄러운건가.. 귀엽다. 더 끄집어내긴 힘든듯 그냥 이렇게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음료와 케이크는 바로 서빙되어 나오고, 그걸 말 없이 냠냠 잘먹고 주스도 쪽쪽 다 빨아먹고는 여유가 생긴건지,
"쌤 안 먹어?"
라고 질문이 날라왔다.
"먹고 있는데?"
케이크는 손도 안대고 있는 걸 안건가, 히로가 많이 먹는 게 더 좋은데. 초코케이크 두 조각 시킬걸 그랬나.
"맛있었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까 화난 마음이 히로 잘 먹는 모습에 다 녹은 것 같다.
"어어.. 맛있어서.."
"고기 먹을 배는 남아있는 거지?"
"어어!!"
"다 먹었어? 슬슬 갈까?"
"응."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고 온 옷이 든 가방을 챙기며 머뭇거리며 일어난다.
"저기, 잘, 먹었어."
손을 잡았더니 그 손을 뺀다.
"쌤, 손.. 어, 언제까지 잡을꺼야."
"지금껏 잘 잡혀 있다가, .......안되는 거였어?"
"......그야...... 사람들 눈도 있고, 그런.... 사이도 아니고."
"안되는 거였구나.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손을 놓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마,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 내가 너무 정신없게 했나보네."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아냐!"
"그래 미안 이젠 안잡을게. 그럼 됐지?"
더이상 담담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 주차된 차를 꺼내와서 히로를 태웠다. 행동 하나에 감동받고, 행동 하나에 우울해지고, 말 한마디에 슬퍼진다. 거부하는 움직임에 화가나고, 싫어하는 말에 미워진다. 이 응어리진 마음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거창할 것이고, 그저 질투라고 보기엔 그 상대가 없다. 그냥 나혼자 짜증나고, 혼자서 화내고, 혼자서 우울하고 나혼자 그러기로 했다. 이건 내문제고, 이 아이와는 관계없다. 내가 정리하면 되는 그저 외사랑이다. 퇴원하면 나아질 것이다. 안보면 잊혀질 일이다. 지금부터 마음을 조금씩 정리해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안되고, 바래서도 안된다. 싫은 사람한테 이상한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버리고 싶겠지. 그저, 그냥... 곁에 있을 때만 잘해주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