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랄까. BBS오프모임이랄까.. 그런곳에 가게 됐는데 물론 내가 돈이 많다거나 그런걸 아는 건 아니고. 뭐 쨌든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갔는데, 정확한 장소를 몰라서 그 주변에 어물쩡거리고 있었는데 꽤 귀여운 사람이 뒤를 돌아본거야. 그 사람이랑 눈을 딱 마주쳤고. 그냥 길 가는 사람이었는데 아 귀엽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임장소를 갔더니 떡하니 있더라고. 근데 그 모임에서의 내 인상이 별로였는지 계속 그 사람은 주최자 뒤에 숨기만 했었어.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었고, 그래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한가했었던 것도 있고 개개인에게 같은 연락을 했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에게선. 시간떼우기용으로 적당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걸 낚아챈개 나랄까?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가까워지고 자주만나고 그랬는데 상대가 대입준비며 뭐 그런걸로 소원해졌달까. 나는 당연히 어려움없이 입학했는데 그 사람은 목표했던 학교 말고 다른곳에 붙어서 재수를 한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좋아졌는지도 잘 모르겠고, 왜 싫어진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계속 내 뇌에선 이 사람이 첫사랑이고 그립기도 하고.. 만나기 싫기도 한 그런 사람.
잠에서 깨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내 옆에 누군가 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착각, 꿈이 너무 현실이어서 그랬던건지, 현실이 꿈같아서 그런건지. 침대엔 혼자였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읏.."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을 때, 허리며 뱃속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은 어제의 밤에 현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휴지통 주변에 대충 버려진 콘돔이며, 콘돔이 분명 있는데도 생리통같은 알 수 없는 복통. 그리고 근육통.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어디선가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에서 전달되는 진동에 알 수 없는 흥분상태로 빠졌다.
"타치바나 입니다."
누구의 전화인지도 확인조차 않고 바로 받아버리는 건 나쁜 습관이겠지만 병원에서 급히 찾는 전화인 경우가 더 많아서 그냥 받아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쌤, 일어났어?"
"어, 응.."
누구 목소리인지 알 법도 같은데 모르는 거 같은 이 상황,
"아침까지 괴롭혀서 미안. 깼을 때 아무도 없는거.. 좀 그래서 전화했어."
멍한 아침에 이게 무슨소리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아.. 응.. 괜찮아."
괜찮다고 말은 하면서 지금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쌤, 진짜 괜찮아? 수업 째면 혼내니까 먼저 나오긴 했는데, 다시 집으로 가?"
낯설다. 이 낯선 광경에 어디서 언제 어떻게 말도 안되는 구분을 지으며 가정을 세워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정해진 답이 있었다.
"....쌤?"
그래도 날 부르는 게 따뜻한게 너무 좋다. 계속 듣고 있고 싶다.
"쌤, 괜찮아?"
"응.. 괜찮아."
전화너머로 보이지도 않을텐데 싱긋 웃어보였다. 괜찮은 상황인가? 내가 방금 전까지 남자랑 뒤엉켜 누워있었는데, 그게 너고, 네가 나한테 넣는 그런 상황이라는 거?
"안되겠다. 쌤, 수업째서 싫어하겠지만 집으로 갈게. 욕을 하든 때리든 맘데로 하고, 일단 집에서 보자. 끊어."
좀 더,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급하게 전화를 끊고 이쪽으로 오려는 모양이다. 침대에 대충 널부러져 누웠다. 아직 침구에 그 아이 체취가 남아 있었다.
"히로..."
목소리도, 체격도, 얼굴도 어른이 된 히로였다. 날 안고 있던 그 다부진 팔도, 키스를 하는 젖살빠진 그 얼굴도. 강하게 밀어 부치던 힘에 부서질 듯 끌어안고 흔들어대던 그 밤의 기억이 밤이 아니고 오늘 아침이었고, 아침까지 침대에 있다가 학교를 간 것 같다. 히로가 그만큼 컸다는 건 몇년이 지난걸까. 아니면 그냥 지금 내가 그저 꿈을 꾸고 있는건가.
금방이라도 올 것 처럼 말을 해서 전화를 끊어놓고, 몇 분 안지난듯 했지만 히로가 그립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일어나고 싶지만 손가락 까딱 하고 싶지 않았다. 베개를 베고 잤는지 베개에서 히로냄새가 잔뜩났다. 베개에 코를 박고, 지난 밤도 아닌 오늘 아침의 생생함이, 내 손으로 나를 쓰다듬으면서 히로를 그리워했다. 일어나기 싫은 게으른 손이 몸을 훑으며 그를 상기시켰다. 여길 이렇게 쓰다듬고, 저길 이렇게 쓰다듬으면 그가 나를 만지던 그 손길이..
"....히로...키...."
가슴께에도 손을 가져와 부비적댔다. 중심부에 손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몸은 금방 달궈졌다. 따뜻한 그 아이의 손은 차가운 어른의 손이 되었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차가운 손이 헤집는 몸은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그 손을 내 손으로 재현하려고 보니 그리 쉽지 않았다. 가슴돌기 주변을 맴돌던 손은 여기는 더이상 재미가 없어서 엉덩이로 옮겨졌다. 내 손인데도 언제부터 엉덩이를 쓰다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익숙치 않은 그 안쪽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느끼게 되었는지. 지금의 내 포지션은 어느 새 그 아이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몸이 되어서인지 가슴을 깨물리는 상상보다는 허벅지를 깨물리는 상상이 더 희열감이 컸다.
"흐응..."
소리를 올려보지만 내 손과 내 목소리에 나 혼자 흥분하기엔 조금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자위도 못하는 바보가 된 거는 틀림이 없었다.
"쌤!"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리면서 차가움이 밀려왔다. 후다닥 뛰쳐들어온 그의 부름에 부르르 무언갈 느끼기 시작하는 내 몸은 그를 재촉했다.
"히로..."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든건지 기절을 한건지 모르겠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흔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꿈을 꿨겠지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신다.
무슨 꿈이었을까.
그저 꿈인걸까.
그런꿈을 꾸고 다시 진료를 보고 수술을 하고 점심이며 저녁배달을 하고 전화도 받았다.
"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목소리보다 조금 높았다. 남성의 성대는 변성기 이후로 목소리가 그리 달라지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쌤?"
"어, 응.."
"바빠요? 방해되는 거면 전화 끊을게요."
"아, 아니. 무슨 얘기중이었지?"
히로와 전화중인데 딴남자 생각이라니. 아니 딴남자는 아니지 그것도 히로니까. 언젠가 먼 미래의 히로, 아니 내가 만들어낸 망상속의 히로키인가.
외출준비를 하며 환자복 입고 나가긴 좀 그런가? 싶어서 집에 가봤다. 어릴 때 입던 옷이 나올까 싶어서 찾아봤지만 전부 지금 입는 옷들 뿐이었다. 걔중에 좀 작았던 옷을 한 벌 갖고 히로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내 옷 입을래?"
게임기를 내려두고 날 본다.
"쌤 옷? ...그냥 이거 입을래."
"환자복 입고 밖에 돌아다니게?"
들고 있는 옷을 보더니 환자복 상의를 만지며 옷을 내려다본다. 몇번이나 세탁한 색바랜옷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환자복은 눈에띈다.
"뭐 어때, 괜찮아."
"엄청 눈에 띌건데? 뭐.. 괜찮으면 말고."
"...어떻게 가게?"
"내 차 타고. 내려서 백화점까지 한 10분? 정도는 걸어가야 되는데, 이거 입을래?"
여름용 가디건을 챙기긴 했지만 지금은 한 여름이고, 밖은 매우 더웠다. 환자다 보니 좀 더운걸로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 가디건을 건냈더니 받아들었다.
"....고마워."
"아, 더울려나.."
내 옷을 안입는다는 의미는 아닌 거 같으니..
"괜찮아. 에어컨 틀어줘."
"내가 말하는 건 밖에 돌아다니면 더울건데.. 아무리 여름 가디건이라지만.."
환자복은 위생적인 면이 있지만 그리 바깥환경에 대해서 쾌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병원 안에 있으면 시스템 에어컨에 잘 조성된 환경이라 괜찮지만.. 머뭇거리며 가디건을 입더니,
"뭐, 오래 걷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말한다.
"....계속 병원안에 있어서 모르나본데.. 밖, 많이 더워. 30도야."
챙겨온 반팔과 반바지를 건낸다. 건낸 옷을 힐끔 보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알았어."
갖고있던 옷을 낚아채던지, 병실에서 날 내보내면 될 일을 옷을 갖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풉.. 귀엽네"
반바지라고 집어온 바지는 왜때문인지 칠부가 되어있고, 상의셔츠는 아빠셔츠가 되어 있었다.
"쌤.. 쌤이 커서 그렇잖아."
"나 그리 큰 편은 아닌데.."
얼굴이 빨개져서 호소하는 그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난 큰편이 아니라고 발뺌해봤자 일본남자가 180넘는 상황에서 큰 편이 아니라니.. 음..
"나.. 나보다는 크잖아. 그리고... 곧 클거야..."
큰소리를 치다가 목소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아진다. 그래, 쑥쑥 커야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쑥쑥 커야 될건데"
"놀리냐. 당신보다 클거야."
궁시렁 거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그래, 얼른 가야겠다. 바지 흘러내리진 않아?"
"그정도는 아냐. 빠.. 빨리가자!"
"그래."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게 더 귀여웠다. 손을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같으면 싫다고 손을 빼거나 뿌리칠 것 같은데 조용히 잡혀있다. 싫지 않은 거겠지? 놀란 표정이라 손 잡은게 불편한건지 안색을 살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어서 아랫쪽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그게 더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다.
"응? 왜 그래?"
"아.. 아냐."
"그래? 갑자기 외출해서 긴장 한건가 싶어서. 아프면 얘기해."
"아.. 알았어."
맞잡은 손은 애기라서 그런지 체온이 높아서 그런지 따뜻했다. 내 손이 찬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따스함이 전해지는 게 너무 좋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주차장에서 내 차를 찾아서 탈려고 그 앞에 섰을 때, 이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상실감에 멍하니 서 있었다. 놓기 싫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찰라에 손을 놓고 왼켠에 선 히로를 봤다.
"풉"
"이쪽이 운전석이네?!"
보통 운전석이 오른편에 있지만 왼편에 있는 걸 보고 역시 남자애다보니 이런 차에 흥분하며 좋아하는 게 보였다.
"아, 응. 독일에서 타던거 그대로 들여와서."
"독일에서 살았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할머니가 외국인이라는 얘기까지 하면 큰일이라도 나겠네.
"응. 잠깐. 에.. 의학연수?"
부러움과 신기함과.. 뭐라고 표현해야될지 모르는 고양감? 귀엽다. 눈 앞에 케이크 쇼케이스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와아, 혼자?"
"어, 응.. 혼자"
"와아.. 좋았겠다."
"글쎄.. 잘 모르겠어."
"왜? 혼자 살면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잖아."
히로는 아마도 집안의 간섭이 제일 귀찮은 모양이다. 나도 그런때가 있었나.. 하고 고민해보지만 그런적이 없었다. 우리집은 방임주의니까. 무슨일을 해도 혼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란 존재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혼자사는데?"
"...부럽다."
부럽다는 얼굴을 하며 입에서 부럽다 하고 나와버렸다.
"같이 살래?"
"내.. 내가 왜 같이 살아!!"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냥 건낸 말이지만 히로의 반응은 역시 귀여워.
"가.. 가자.."
차 앞에서 한참 얘기 하다가 드디어 차 안에 들어왔다. 싱글거리며 운전을 하는데 시선이 엄청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차 내부를 둘러보는 눈빛이며, 운전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야? 반한거야?
"왜 그래?"
장난스레 말을 건냈다. 아직 '같이 살래?'라는 말에 반응한 자신이 부끄러운건지,
"아! 그냥. 신기해서.. 구경한거야."
라고 둘러댄다.
"차가? 별로 특별할 거 없는데.."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것도 신기하고. 맨날 이거 타고 먹을 거 사러 갔엇어?"
"응. 반대쪽에 있으면 운전하기 불편해서."
물론 도로법도 좀 달라서 운전하기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도로폭이 좁다. 한참을 물끄러미 신기한듯 쳐다보길래 싱긋하고 웃어보였다. 사실 이 차 말고 다른차도 많이 있다는 건 당분간 비밀에 부쳐둬야 겠다. 정체구간에 정체도 없어서 예상시간대로 도착했다.
"다왔네."
주차장에 들어가서 빙글빙글 돌며 주차할 곳을 찾았다. 주차를 하고 내리려고 보니 뭘 신기한 게 있는지 두리번 거리며 벨트를 풀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손을 낚아챘다.
"헤메면 안된다. 눈에 띄긴 하지만."
이세탄 주차장에서 내려서 마루이 아넥스까지 걷는데 대략 20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환자복이 아니긴 하지만 옷이 아무래도 큰 편이랄까. 패셔너블 하다고 하면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 손 잡아놓고 어떻게 헤메."
손 잡은 게 불만은 아닌 듯.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가볍게
"그래"
라고 흘려들었다. 한여름의 아스팔트 거리, 그림자 없는 직사광선의 한 여름의 더위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도 히로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내 손의 차가움을 녹여줬다.
"저기다!"
".....저기가?"
"응."
건물 아웃테리어보다 아무래도 내부에 들어갔을 때의 화려함은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패션관련 편집샵들이 부분 부분 위치를 하고있는 중에 1층은 모자며 악세사리류가 주류였다. 히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이었다.
"유니클로 가는 거 아니었어?"
"유니클로? 그게 어딘데?"
"여기저기. 체인점이라서.. 여긴 너무 비싸잖아."
"비싸? 그런거 신경써?"
입고있는 셔츠가 얼마인지 비밀에 부쳐둬야 될 것 같은데...
"..... 나는 쌤이 간단한거 사줄 줄 알았는데.."
"간단하달까.. 그냥 내가 입고 싶은데 못입는거 사주고 싶어서, 엘리베이터 저쪽이다~"
손 잡고 끌고갔다. 엘리베이터에 둘이서 두근거리며 데려갔다. 내 기대에 반하는 표정의 히로가 보였다. 부담스럽다는 게 얼굴에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옷들이 보이니 놀란 표정이다. 다른 가게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둘러보지만 그리 넓지않은 작은 관이라 한바퀴 휙 돌아서 다시 내쪽으로 돌아왔다.
"여기, 이거."
".......이거?"
인터넷으로 둘러보다가 어쩌다 보게 된 귀여운 옷이라 히로 생각하면서 선물로 사둘까 하던 옷이었다. 세일러 셔츠에 리본, 그리고 호박바지에 서스팬더까지 완벽한 귀여움이었다.
"응 이거! 귀여운데! 나한테 안맞아."
".....코스프레냐"
"아니 생활복"
내 눈치를 한껏 보다가
"귀엽기는 한데, 나랑 안 어울려."
거절했다.
"아니야! 어울려! .....입어봐주면 안되?"
"어딜봐서 어울리냐!!!"
싫은가보다. 싫다는데 강요할 순 없지.
"싫으면 말고."
"좀 더 무난한 거 없어?"
"무난한거.. 음.. 이게 그나마 무난한 쪽인데.."
반바지에 세일러 칼라, 서스펜더 조합이 귀여워서 히로가 입어줬으면 좋겠어서 데리고 왔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왜 여자애옷을 입힐 생각이냐?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몇마디 궁시렁 거렸더니 눈치를 살피더니 주저하다가 입을연다.
"내가 입기엔 너무... 귀엽, 잖아."
"히로도 귀여워!!"
"미쳤냐!!!!!!"
"귀여운데..."
당연히 귀여우니까 귀여운 옷을 입히려는 거지!! 라고 하고 싶은데 그 말을 제대로 못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싫은건지,
"...노.. 놀리지마!!"
하고 소리친다.
"따.. 딴거. 딴거..."
"딴거?"
"딴거."
원래 여성복 코너 중에 유니섹스인 남성복인 터라 남자애가 입을만한 옷은 그다지 없는편이다. 원피스를 입어주면 더 귀엽겠지만 그렇게까지 여장을 강요할 생각은 없고, 그냥 반바지에 세일러...
"꼭, 이거 입어야 해?"
미니헷까지 써주면 완벽하게 귀엽겠지만 반바지엔 거부감이 없고, 세일러 칼라가 너무 귀여운건가...
"싫으면.. 말고.."
아무리 뒤적여봐도 저거만큼 무난한 옷은 없고, 귀여운 옷도 없고, 입어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정도 옷에..
"유니클로가 어딘데."
"화났어?"
"아니,"
"....화났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유니클로 옷이면 되는거지?"
"어."
"그게 어딘데?"
"이 근처에."
"뭐야? 너도 몰라?"
"...나라고 유니클로 매장이 어디인지 다 아는 줄 아냐?"
할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유니클로 라고 검색하니 신주쿠 역 근처에 매장이 있는듯 보였다. 여기옷은 별로고 처음부터 유니클로 옷을 원했으니 그리로 데리고 갔다. 여유없는 걸음걸이로 끌고가듯이 유니클로 매장으로 왔다.
"....쌤.... 그...."
"여기네."
짜증과 울컥함이 눈물이라도 날까봐 애써 참아본다.
"맘에드는 걸로 골라와."
매장을 둘러볼 생각도 없이, 입구 한 켠에 있는 결재카운터 앞에서 옷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다. 잠깐 기다리기 금새 가져왔다.
"이거면 되?"
"어."
바로 계산하고 옷을 건낸다. 계산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깔끔한 흰색 티셔츠에 적당한 면바지를 입고오니 별거 아닌데 기분이 풀렸다.
"배, 고파?"
"어."
"바로, 고기 먹으러, 갈까?"
괜시리 화난게 미안해서 사과할 마음으로 카페를 갈려고 먼저 물었다. 배고파서 고기 먹고 싶다면 먼저 고기 먹으러 가고, 아니면 카페가서 케이크 한 점 사주고 싶었다.
"잠깐, 어디 좀 들르면.."
"가고 싶은 데 있어?"
"어, 응.. 들려도 되?"
"그래."
아까와는 다르게 히로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데려간다. 여기 였던거 같은데..
"딸기가 없네.."
딸기가 없다는 말에 점원이 다음달에 여름딸기가 나온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딸기케이크가 없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생일 케이크 예약 되죠?"
물론이죠 라고 대답한다. 히로 케이크 여기서 예약 하고, 또.. 초코 있는데 초코는 싫으려나..
"맘에 드는 거 없어? 딸기 말고는 안먹어? 초코도 있고.."
"아니 초코도 좋아."
"마실꺼는?"
"이거...."
부끄러워하며 복숭아주스를 가리킨다.
"....초코 케이크, 복숭아주스, 다즐링... 케이크 다른 거 더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
"... 풉...."
초코 케이크에 복숭아주스, 그리고 고기. 인가.. 단순함에 너무 귀여워서 카운터 앞에서 배잡고 웃었다. 너무 귀여운 내 히로..
"고기는 나중에 사줄게. 여기서 파는걸로."
무의식적으로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 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 실수가 부끄러운건가.. 귀엽다. 더 끄집어내긴 힘든듯 그냥 이렇게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음료와 케이크는 바로 서빙되어 나오고, 그걸 말 없이 냠냠 잘먹고 주스도 쪽쪽 다 빨아먹고는 여유가 생긴건지,
"쌤 안 먹어?"
라고 질문이 날라왔다.
"먹고 있는데?"
케이크는 손도 안대고 있는 걸 안건가, 히로가 많이 먹는 게 더 좋은데. 초코케이크 두 조각 시킬걸 그랬나.
"맛있었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까 화난 마음이 히로 잘 먹는 모습에 다 녹은 것 같다.
"어어.. 맛있어서.."
"고기 먹을 배는 남아있는 거지?"
"어어!!"
"다 먹었어? 슬슬 갈까?"
"응."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고 온 옷이 든 가방을 챙기며 머뭇거리며 일어난다.
"저기, 잘, 먹었어."
손을 잡았더니 그 손을 뺀다.
"쌤, 손.. 어, 언제까지 잡을꺼야."
"지금껏 잘 잡혀 있다가, .......안되는 거였어?"
"......그야...... 사람들 눈도 있고, 그런.... 사이도 아니고."
"안되는 거였구나.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손을 놓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마,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 내가 너무 정신없게 했나보네."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아냐!"
"그래 미안 이젠 안잡을게. 그럼 됐지?"
더이상 담담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 주차된 차를 꺼내와서 히로를 태웠다. 행동 하나에 감동받고, 행동 하나에 우울해지고, 말 한마디에 슬퍼진다. 거부하는 움직임에 화가나고, 싫어하는 말에 미워진다. 이 응어리진 마음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거창할 것이고, 그저 질투라고 보기엔 그 상대가 없다. 그냥 나혼자 짜증나고, 혼자서 화내고, 혼자서 우울하고 나혼자 그러기로 했다. 이건 내문제고, 이 아이와는 관계없다. 내가 정리하면 되는 그저 외사랑이다. 퇴원하면 나아질 것이다. 안보면 잊혀질 일이다. 지금부터 마음을 조금씩 정리해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안되고, 바래서도 안된다. 싫은 사람한테 이상한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버리고 싶겠지. 그저, 그냥... 곁에 있을 때만 잘해주면 되겠지.
もっともっともっと君に伝えてたら 좀더 좀더 좀더 네게 전할 수 있었다면 ねぇ、ずっとずっと隣にいたのかな 응, 줄곧줄곧 옆에 있었으려나 きっときっときっと今はもう届かない季節 분명 분명 분명 지금은 전할 수 없는 시기 手のひらでそっと溶けたGood bye my winter tale 손바닥에 살짝 녹은 안녕 내 겨울 이야기
もう冬が来たと白い息で教えてくれたねあの日 벌써 겨울이 되었다고 흰 입김으로 가르쳐 주었지 그 날 そう、たわいもない場面の方がなぜか思い出すたび突き刺さる 그래, 별 것 아닌 장면이 어째선지 떠오를 때 마다 아파
君のいない街がこんなに寒いなんて 네가 없는 거리가 이렇게 추울 줄이야
もっともっともっと強く抱きしめたら 좀더 좀더 좀더 강하게 끌어안았다면 ねぇ、ずっとずっと触れずにいたかな 응, 줄곧 줄곧 건들이지 않고 있었으려나 きっときっときっといつの日か想い出に変わる 분명 분명 분명 어느 날인가 추억으로 변해서 降り積もれそっと胸にGood bye my winter tale 나려 쌓여 살짝 가슴에 안녕 내 겨울 이야기
あぁ、かじかむ手を繋ぐ夜も目覚まし代わりの声も 아아, 메마른 손을 잡은 그 밤도 알람을 대신한 목소리도 そう、いつのまにか移っていた口癖も笑うポイントも 그래, 어느샌가 옮아버린 말버릇도 웃음 포인트도
あたりまえと思ってたものは奇蹟だった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기적이었어
もっともっともっと笑わせてたかった 좀더 좀더 좀더 웃게했다면 ねぇ、ずっとずっと離れたくなかった 응, 줄곧 줄곧 떨어지기 싫었어 きっときっときっと雪のように儚い願いは 분명 분명 분명 눈처럼 허무한 바람은 音もなくそっと消える 소리도 없이 조금씩 사라져
いつかどこかで君があの頃を思い出す時 언제 어디선가 네가 그 때를 떠올릴 즈음 笑顔でいてほしいただ幸せでいてほしい 웃는 얼굴로 있어 주었으면 그저 행복하길 바라
もっともっともっと強く抱きしめたら 좀더 좀더 좀더 강하게 끌어았았다면 ねぇ、ずっとずっと離れずにいたかな 응, 줄곧 줄곧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으려나 きっときっときっといつの日か想い出に変わる 분명 분명 분명 어느 날인가 추억으로 변해서 降り積もれそっと胸にGood bye my winter tale 나려 쌓여 살짝 가슴에 안녕 내 겨울 이야기 Hello my brand new days 안녕 내 새로운 나날들 Under the bright sky 밝은 하늘 아래
그리고,
할로윈이 끝나고 나면 바로 크리스마스 돌입이다.
백화점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그 시즌을 아무래도 그냥 쉽사리 넘길 수 없었다. 조금씩 날이 추워지고 눈소식이 들린다. 도쿄와는 다르게 센다이의 겨울은 혹독하다. 도쿄와는 다르게...
도쿄로 진학한 오이카와 토오루. 그의 묘한 리더십이며 여러가지 활약상들은 센다이, 미야기, 토호쿠의 사람들은 알고있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그저 흔하디 흔한 취준생 중 하나였다. 다행히 빠른 취직준비와 그의 리더십이나 성격은 그대로여서 봐주는 면접관들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봐주는 덕분에 쉽게 내정자가 되었고, 지금은 졸업논문 준비중이었다.
***
--- 벌써 겨울이네.
다른 곳보다는 빠른 겨울이다. 그건 토호쿠니까 당연한 일이다. 교복에 코트를 입고 머플러까지. 아무래도 스타일이 좋으니까. 게다가 머리카락 탓인지 누가 머플러를 그렇게 코디네이트 한 탓인지 겨울연가의 배용준 닮았다는 소리를 하질않나. 미남이긴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하고 과거 회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특별할 거 하나도 없는 일상 속의 일상.
흔하디 흔한 그런 스치는 추억 하나 하나가 아려온다.
그 때, 고백했으면 그나마 여기에 있었으려나. 하는 후회도 함께.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라면 들어주었으려나.
옆집에 이사와서 지금껏 함께하다가 대학진학이라는 이유로 도피하듯 도쿄로 나간 토오루를 잡지 못한 과거의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 때 그 고백,
***
교복에서 이미 졸업했지만 스타일이 좋은 건 여전했다.
브이넥 스웨터에 모섬유 베이지색 체크바지. 그리 춥지 않은 도쿄에서 왜이렇게 외로움에 사무치는지 모르겠다. 방학때면 종종 만나러 가도 될 일인데 무슨 억지인지 4년 내내 단 한 번도 집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매번 뭐라고 연락이 왔지만 몇번의 독촉끝에 안듣는 걸 알자 그냥 짐싸들고 도쿄 관광 겸으로 아들 얼굴을 보러 왔다고 했다.
어째서인지 듣고 싶지 않은 하지메 이야기를 하면서 백화점에서 일해서 이런것도 챙겨준다느니, 이번엔 승진을 해서 주임이며 과장이며 되었다느니.
"토오루, 토오루. 얘, 듣고 있는 거니? 토오루!"
"귀 뚫려있으니까 들린다구요!"
뭐가 그리도 싫은지 하지메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으면 아들을 보러온건지 하지메 보고를 하러 온건지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서 말이다, 토오루. 같이 지내는 건 어떠니?"
"네?!"
"그러니까, 하지메가 말이지, 도쿄로 전근오게 생겼지 뭐니? 집도 넓은데 그냥 같이 지내면 어떤가 해서. 하지메는 남도 아니잖니."
"엄마, 하지메가 왜 남이 아니에요?!"
"얘는, 옆집산게 몇년째인데 매정하게.. 너도 출퇴근하면 패턴이 똑같아지니까 같이 지내면 되지 않겠니? 어차피 아버지 등쌀에 못이겨서 선보고 결혼해야 될건데, 만나는 여자라도 있는거니? 집에 데려오거나 그런거에 불편할까봐서 그러니? 하지메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쿄 이 도심 한복판에 혼자 사는것도 그렇고."
"어머니 아드님은 그런 도쿄 벽지에 혼자 산지 4년째라구요!"
"그건 니가 좋아서 나간거다~? 내가 언제 도쿄로 진학하라고 그랬니? 난 그저 그대로 진학할 줄 알았는데 니가 나가놓고 큰소리니 아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와이즈미가 도쿄로 전근을 온다고?
"윽.... 싫어.. 오이.. 흣... 오잇... 카와..."
눈물로 젖은 하지메는 색기 넘치는 신음을 흘러내고, 눈에서는 누구보다 싫다는 경멸의 독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2층 창문으로 급습해서 그 날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나와 이와쨩 둘만의 비밀이고 아마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싫은 게 어딨어. No는 없어. 대답은 Yes 뿐이야."
"응... 읏...."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추듯이 집어넣고 이어져 하나가 되어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하면서도 눈 앞에선 별이 튀어 올랐다. 익숙치 않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극이었고,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해는 뜨고 다음날은 다행인지 계획적인지 학교가는 날은 아니었다. 은퇴는 했지만 고3인 그들에게 학교란 중요했다. 특히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둘에게는. 물론 부속고이다보니 쉽게 진학할 수 있다.
"잘잤어?"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때 한 침대 이불을 덮고 잔 그 여러가지 정황과 흔적들을 보면(물론 어느정도 정리정돈 되었긴 했지만) 분명 어제의 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허리를 폭격했다.
"너, 오이카와!!! 으윽.."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어제의 격렬함이 느껴졌다. 분명 배구로 단련된 몸일텐데도 배구에서 쓰는 근육과 섹스하며 쓰는 근육은 확연히 달랐다.
"헷. 이와쨩~ 베에~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놀리고 있는지 머릿가죽을 다 벗겨놔서 대머리로 옆에 계속 두고 싶었다. 대머리가 되면 여자애들한테 인기 없겠지? 머리 까지고 배나온 아저씨로 옆에두고 싶다. 아아,
"어제, 뭐한거냐."
"떽뚜~"
"야, 있... 쓰아... 후... 아파서 소리도 못치겠네..."
"모닝 떽뚜, 어때? 이와,쨩?"
아직 똥꼬가 욱신거리고 허리 근육이며 목도 나간 이 판국에 이건 지금 나한테 입에 뭘 물고 페코쨩 표정을 지으며 어제 뭘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텐트를 잠재우기 위해서 한 판 더? 란 시비를 붙이고 있는지..
"왜? 나름 부드럽게 해준거 같은데. 이와쨩 어제 귀여웠어. 목소리도 앙앙.."
"오, 이, 카, 와,"
"에, 엣? 응? 네, 예."
누워서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조물딱 조물딱 거리는 손이 옷 속으로 들어오는 게 시작이었는데 그 손이 좆이 되었고 그 좆이 몸속으로까지 파고 들어올 지는 손이 들어올 땐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너, 절교야."
"에? 에에~~? 지금 열심히 사과하고 있잖아? 에, 절교는 너무 하지 않나?"
"당, 장, 나가. 창문으로든 방문으로든 나가. 내 눈앞에 얼씬도 하지마."
아마도 그 때 이후로,
둘 다 아오바죠사이 진학을 포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질 궁리를 했던것같다. 이와이즈미는 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고, 오이카와는 도쿄로 진학을 하므로써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빈자리를 빈 채로 남겨둔 채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머플러를 꽁꽁 싸매주던 그 이와이즈미의 손길은 이제 없고, 장갑을 챙겨주던 오이카와가 곁에 없음을.
어째선지 한짝만 남아있는 장갑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한 쪽 장갑만 유독 잘 흘리고 다녔다. 그게 무슨 연유인지 뭐 하나 챙길 줄 모르는 오이카와가 챙기던 왼쪽장갑이었고, 매번 오른손만 남아서 같은 걸 사도 소용없었다.
전근이 정해지면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만날지 고민하고 있었다. 토오루의 엄마가 그런 일을 꾸미는 것도 모른 채.
***
"토오루,"
"네. 어머니."
"여긴 누구 소유의 멘션이지요?"
"어머니 소유십니다."
"그래서, 세금는 누가 내지요?"
"어머니께서.."
대학생이 누리기에는 호화로운 4LDK의 맨션에서 혼자 4년을 지냈다. 침실이며 서재며 따로써봤자 손님방 내놓고도 방 하나가 충분히 남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뭐라고 했지요?"
"이와쨩, 아니 이와이즈미 하지메군을 입주자로.."
"다년간 잘 지내왔으니, 내일부터도 잘 지내봐요~"
"네, 어머... 내일? 지금 내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머, 뭐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변명할 여지도 없었고, 그를 철저하게 가드한 어머니야말로 아들을 내놓은 자식인지 손주보길 포기하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일부터, 이와쨩이랑 동거인가...
혹시나 해서 적어둡니다. 다음편은 없어요. 다음편은 없다구요!!! 꿈도 희망도 없이 다음편도 없다구요?! ---- 도망
품속에서 자고있던 히로가 깬 듯 했다. 품속에서 부시럭 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른척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어쩌면 자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뭐랄까. 자고 있는데 깬 듯한 그런? 새벽녘엔 좀 빨리 깨는 편이다. 밤에 일찍자는 이유가 피곤해서 그런 것도 있고, 집에서 일찍자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났으니까. 대신 엄마가 자는 새벽엔 뭐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날만한 무언가는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가위 눌린듯한, 저혈압이라면 흔히 겪는 정신은 멀쩡히 깨있지만 몸은 덜깬듯한 그런 느낌의 새벽녘. 품에서 빠져나가는 히로를 끌어안을까 하다가 움직이지 않는 몸이 말을 안들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빛에 혹시나 내가 깰까봐 배려해주는 게 너무 귀엽다. 피식, 하고 웃는 소리도 들린다. 나를 쓰다듬는 느낌도 든다. 내가 좋은 거겠지? 좋아서 만지는 거겠지..?
눈이 아닌 전신의 감각으로만 무언가 다가와 쓰다듬고, 숨결이 가까워짐이 느껴졌다.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 그리고 그 꽃잎은 금새 멀어졌다. 놀라서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키스 해달라고 웅얼거려 보았지만 몸이 아직 말을 듣지 않았다. 멀어져서는 가까이 올 기미가 없다. 가까이 온다면 품속에 가두고 모닝 섹스라도 하고 싶은 마음인데 좀체 움직임이 없다. 놀란건가?
한참 멀어져 있다가 좀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다가왔다. 자고있는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 코, 볼을 쓰다듬고 입술을 다시 터치한다. 가위 눌린듯한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근거림이 나한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히로의 심장소리가 아니라 내 심장소리인가? 심장의 고동은 높아지고 귀 옆에 심장이 있는 거 같은 기분나쁨이 밀려왔다. 소화가 안되는 꽉막힌 느낌, 심장이 위장 옆에 있어서 그런건지, 단순한 소화불량인지 모를 압박감. 생각지도 못한 신음이 튀어올랐다.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멈칫-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잡아 끌어서 품속에 꼭 가두고 싶다.
멀어진다.
아직 자고 있는데도 절망감에 빠져 있는 힘껏 얼굴을 찡그려본다. 뭐라고 잔소리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간의 주름에 손이 닿는다. 뻣뻣한 몸은 그 손짓에 자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손을 덥썩 잡았다. 그 손에 의해 마법이 풀린 것 같았다. 눈을 떴다.
"잘 잤어?"
싱긋 웃어 보였다. 기대했던 만큼의 놀람이 얼굴로 전해지고, 부끄러움에 도망갈 기세였다. 그 손을 잡아끌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균형을 잃고 이쪽으로 쓰러진다. 그걸 이용해서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다. 입술이 닿을 때 부터 혀가 닿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을 지금 쏟아낸다. 입술과 입술이, 혀가 얽히면서 내는 마찰음, 침이 엉기며 내는 미끈한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끌어안고 몸을 부비적댄다. 뜨끈한 중심은 기다린 듯 고개를 들어 서로를 찔러댔다. 밀어내려고 필사적인 팔을 끌어안고 온몸으로 부비적댔다. 버럭 소리칠려고 하는 입안은 혀로 가득차서 아무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금새 녹아내려 향긋한 신음이 귀에 녹아들었다. 입김이 닿을 듯, 귓가를 속삭인다. 종종 기분좋을 때 귀를 핥아주는 게 너무 좋다. 언제부터 내 성감대가 귓불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걸 개발한 건 다른사람도 아니고 히로다.
"히로ㅡ"
배아랫쪽에서 뜨거운 눈물이 올라와 왈칵 울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어젯밤의 얽힘은 아침까지 계속되며 손을 잡았다.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날이었다. 어느 새 히로는 쑥쑥커서 내 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그 전엔 그리 욕심내지 않았는데 날 리드하고 자기가 하고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걸 받아들이고, 그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어젯밤에 처음, 날 히로에게 주었다. 버진이 아니라는 점이 좀 애석했지만 사귀면서 처음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아마 그래서 먼저 잠들고 늦게까지 아침잠에 빠졌고, 처음있었던 '그 일' 때문에 약간 가위에 눌린 듯 하다.
이제 괜찮다. 나에겐 마법사이자 해결사인 히로가 있고, 서로 사랑해서 하는 쌍방을 위한 섹스이니까ㅡ
내가 가르쳐준 자잘한 밤의 유희는 내 몸위에 펼쳐졌고, 그걸 받아들이는 일은 쉬웠다. 좋아한다는 표현이고,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히로를 믿고 받아들이고 그걸 즐긴 첫번째 밤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성 외곽 이면서도 부둣가이고, 상거래의 중심의 에도. 그 곳에서 꽃을 팔기 시작한 건 어렴풋이 기억이 있을 때 부터였다. 여자들은 이미 몇 남지 않아서 기생으로 팔아버리는 건 거의 어린 남자애들이다. 이상하게 여기 요시와라의 창기들은 죄다 남자애들로 구성되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여자들은 다 돈있는 집에 들어가서 2세를 낳고 키우고, 전쟁고아도 여자들은 그렇게 호강하는데 반해서 남자들은 그 남자들을 상대하고 있다. 남성 포화상태. 여성 기아상태. 그런 곳에서 생기 있게 보이기 위해 붉은 등을 켜놓고 꽃을 팔고있다. 꽃. 그래 이쁘게 말해서 꽃이지 암술을 숨기고 있는 암꽃에 비해 숫컷은 아무짝에도 쓸데 없어서 널어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곳에도 인기는 있는놈은 있고 없는 놈은 없는 곳이다.
"하지메, 오늘 예약 손님 좀 있냐?"
"아니. 토오루 밥 주려면 한 둘은 좀 받아야 되는데.."
"그 놈은 사내놈이면서도 일도 안하고 너한테 맨날 빌붙어사냐?"
잔소리는 내 몫이고, 시비걸지 말라는 듯 있는 힘껏 째려보는 이와이즈미 하지메. 요시와라에서 1, 2위를 다투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남자들한테 엄청 잘 팔리는 게 너무 아니꼬와서 강제로 그만두게 만들었다. 내가 꽃을 팔테니 넌 그냥 벽화가 되어 있으라고. 처음에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는 당연히 반발이 컸다. 내가 원해서 그러고 싶으니까ㅡ 라는 이상한 말로 입을 닫게했고, 그를 가둬두게 되었다.
그리고 일을 나가지 않는 오늘같이 손님 없는 날, 하루종일 함께 둘만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두어 달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이 적은 시간이 이와이즈미를 하루 하루 살게 만들었다.
"여어-"
후스마를 가로로 밀어서 열어보니 자는것도 아니고 깨있는 것도 아닌 오이카와가 있었다.
"오이카와."
손을 내밀어 흔들어 깨어보았다. 아편통이 널부러져 있는 걸 보니 약을 한 모양이다. 그가 꽃을 팔기 시작할 땐 향을 피워 흥분제로 사용했고, 그 일을 그만두면서 감금생활을 하면서는 아편에 손을 댔다. 분명 그가 일을 했다면 더 벌었을 것이다. 좀 더 멀쩡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유곽따위 나가서 따로 생활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멀지만 늪지 지나서 수풀 너머에 작은 바닷가 마을에 생선배를 타며 살아가는게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이와쨩.."
몽롱한 표정,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듯한 목소리.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날 보지 않는 눈빛. 동네에 들어오는 썩은 생선눈보다 탁한 눈빛. 이런 눈빛을 보고 싶어서 여기에 둔 게 아닌데..
"하지메, 뽀뽀."
"뽀뽀.."
입을 벌려서 입 안으로 밀려오는 미끈거리는 혀는 움직임이 둔했다. 그래도 받아들이고 쪽하고 끌어당겼다.
"아편... 다 떨어져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편부터 찾았다면 손이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육하기도 했다. 내가보이면 나부터 찾아달라고. 얼마나 심각한 집착인지 알고있다. 나만 봐야 한다고 몇번이고 소리쳤다. 그리고 약으로 꼬셨다. 나쁜일임을 알지만 이건 이렇게 해야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한다. 강제적이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손찌검을 하기도 했고, 실로 묶어 고통을 더 하기도 했다. 약때문에 오히려 둔감해졌는지, 유두를 물어 뜯으면 아픔보단 느껴서 부들부들 거렸다.
나만 맛보고,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해. 오이카와 토오루ㅡ 여자가 없기도 했지만 여자들이 사러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떻게 있지도 않은 여자들이 여기까지 발을 옮겨서 사러 온다는 말인가 라고 할 정도로 여자한테 인기가 많았다. 다들 처첩으로 부유층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종종 다른 남자맛을 보러 유곽외출하러 오시는 마나님들이었다. 마나님들 마음이라 종종 나다니는 아들 중에 오이카와 어릴 때를 빼다박은 얼굴도 보였다. 그만큼 절조도 없었고, 그 집에서도 그냥 집의 부인이 낳은 아들은 자신의 아들로 키우는 집이 허다했다. 종종 아들은 필요없다고 유곽에다가 버리는 애들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하지메 스스로 이 방에서 나가질 않는다. 내가 그렇게 교육 시켰다.
"하지메ㅡ 뭐 할까?"
"이와쨩이 좋아하는 거."
헤실ㅡ 웃어보이며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고 나에게 다가와 옷을 벗긴다. 기모노란 벗기는 미학이 있는 옷이다. 뒤로 나자빠지듯 그를 위에 올리고 손길에 맞춰서 하나씩 벗겨지는 옷이 제 역할을 했다. 오비는 허리에 두른 채로 아랫쪽에 손이 꼼지락 거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애타게 움직였다.
"흐으... 하.. 지메.."
손가락은 쉽게 열리는 문으로 들어가 이쯤인가? 하고 긁어댄다. 약기운에 취해서도 정확한 위치를 메만지는 손가락에 별거 아닌 일이지만 가슴이 돋아난다. 꼿꼿하게 선 가슴돌기는 양쪽으로 벌려진 기모노 옷깃에 스치며 톡톡 터지고 석류같은 붉은 빛으로 그 입을 기다렸다. 오이카와는 혀로 발기된 가슴께를 핥았다. 그리 크지 않은 유륜 주변을 빙글 혀 끝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살짝 빨아올렸다. 금세라도 울것같은 표정으로 한껏 찡그린 채 좋다고 앙앙거리는 건 다 꽃파는 남자라면 할법한 연기다. 하지만 이건 느끼는 걸 참았는데도 앗 하고 소리낼 수 밖에 없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희열이었다.
"혼자.. 그러는 거.."
싫다는 입을 막아버리는 건 그의 입이었다. 유두를 괴롭히는 건 입에서 손이 되어있고 입을 입으로 막아버리고 아랫쪽 입은 기둥을 꽂아넣었다. 악 하는 소리도 못내고 깊숙히 들어간 그의 중심은 그 중심에 들어가 열쇠가 딱 맞게 들어간 즐거움은 허리에서 목 위로 스스슷 하고 올라갔다. 양손은 목 주변에 둘러서 놓아주지 않는다. 양 다리는 허리에 꽉 묶여서 움직임을 재촉한다. 이렇게 유연해진 건 누구에게 배워서인지, 힘차게 들어오는 그의 움직임에 반한 게 언제인지,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그저, 즐길뿐이다.
옆에서 손님받는 소리나 방 안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나 같은소리가 울려퍼지지만 저쪽은 화대를 받고 이쪽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이고, 즐거움이다. 움직임이 최고조로 달하고, 쓸림이 더이상 느껴지지 않고 서로의 열기와 이어진 곳의 감각만 남아있을 때, 가장 즐거운 시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하지메의 예쁜 모습. 지쳐서 몸 위로 겹쳐지는 오이카와를 끌어안는다. 등은 땀으로 끈적이고, 이어진 채로 계속 있고 싶지만 누우면서 스르륵 빠진다. 자신의 정액도 뿜어져서 배가 끈적였고, 가랑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정액도 끈적거린다. 하지만 그리 예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느껴지는 건 위에 올라와 있는 오이카와의 따스함.
"쿠소카와.."
"하아, 하아.."
대답 못할 정도로 숨이 가빠서 위에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냥 두면 잘 것 같다. 좀 더 보고 싶다. 좀 더....
"이와쨩!!!"
번뜩 눈이 뜨였다.
"이와쨩이 수업중에 자는 거, 별로 없지 않아? 무슨 일 있어?"
혹여 아플까 열을 재려고 이마로 올라오는 손을 떨쳐낸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근데 지금 몇시야?"
"수업 끝나고 이제 부활동 갈려고 깨웠지~ 수업중에 졸면 안되요, 이와쨩~"
"누가 졸았다고 그래!!"
"에에? 지금 졸았던게 아니고 뭐야?!"
티격태격 대면서도 서로 챙겨서 가방 들고 이동한다.
꿈이구나.. 근데 꿈이 너무 현실적이고, 뭐랄까.. 이 녀석을 감금 한다고 순순히 감금 당해줄까? 너무 꿈이 큰 거 아닌가..
가죽공방에 물어서 은세공공방을 소개받았다. 펜던트? 팔찌? 어디든 참으로 걸 수 있게 작은 사이즈로 어떻게 만드는지 배웠다.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첫 작품 치고는 잘만드는 편이란 소릴 들었지만 겉치레로 들렸다. 소개받을때 저기 외과의 겸 오너 아들이란 소릴 들었겠지. 양각틀보단 음각으로 이름을 새기고 싶었다. 양각이면 바로 티나니까. 약간 사인처럼 흘려 쓴 그 상대의 이름위에 완성기념으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ㅡ My kitten, Hiroki
쓰고나서 좀 후회했지만 줄지말지도 사실 고민이다. 키튼이라니... 처음 만든건 그렇게 넣어두었다. 그 다음에 좀 더 연습해서 만들다가 살짝 손에 상처가 낫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계속 신경쓰였다. 아무래도 손을 예민하게 쓰는 직업이다 보니 한동안 계속 신경쓰였지만 결국 완성했다.
ㅡ Shoo Tachibana
내꺼에 이름쓰는 감각으로 독점욕이 폭발했다. 갖고싶다 내꺼하자. 화내려나.. 요즘은 괜찮아보이던데.. 밤에 찾아가는 걸 알게되면 어떤 반응일까도 궁금하고. 갖고싶다. 내꺼라고 이름 써놓을 수 있을까.
두번째 작품도 결국 넣어두었다.
언젠가, 하나쯤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쩌면 하나도 못 줄 수도 있고, 둘 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곁에 있고 싶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헤어진다고 해서 슬퍼 죽을 정도도. 순간은 잠시 힘들다가도 그리고 조금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그게 사랑이고, 헤어짐이고 잊혀짐이다.
할 일도 없는 책상에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깨에 기대서 앞으로 꼬꾸라진다. 외과의사의 책상이란 의미도 없이 아무것도 없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술을 할 것이라는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일 외엔 데스크워크란 거의 없고, 수술대 위에서 잠든 환자를 수술하는 게 본 업무이다. 내과의사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어떤 약물을 얼만큼씩 쓰는지 오더도 내고, 환자의 상태도 확인한다. 사실 내과의에게 맡겨야 하는 일을 억지로 보고있는 환자가 한 명 있다.
마에다 히로키
몇 달 전에 응급수술로 입원한 환자로, 그 마에다 의원의 둘째아들? 셋째아들? 인가 라고 한다. 아마도 병원에서 보단 VIP주최 파티장 같은 곳에서 스쳐지났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자고있는 그 아이를 손 댄 건 확연한 범죄다. 동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책임은 범한 자가 지게 되어있다. 수술 역시 그러하다. 수술동의서를 보호자에게 받아내는 일도 그 수술에 대한 설명과 그에대한 리스크를 보호자에게 알려주고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겠다는 의미에서 동의를 받는 것이다. 얼마의 확율로 사망할 수도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의사인 내가 아닌 보호자에게 책임을 넘긴다는 의미이다.
이 아이의 보호자, 한 번도 본 적 없다. 사진이나 티비라면 본 기억이 어렴풋이 있을지도 모른다. 워낙 유명인사다 보니, 아니 선거철엔 시끄럽게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있는 사람이다보니..
그것보다 곧 퇴원이네. 보내고 나면 시원섭섭하려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큰 존재였을까 하는 우려를 하면서 퇴원준비를 하고 있다. 오히려 바쁘면 나을 것 같은데. 일에 치여서 제대로 못봤다면. 시간이 남으니 딴생각이 들고 그게 주로 나쁜기억들이다. 그래서 우울해진다는 게 정설일지도 모른다.
보내기 전에 고백이라도 할까. 마지막으로 보게 될건데, 고백 한다고 바로 굳은 표정 지으면서 그렇게 안봤는데 라며 포비아 같은 행동을 보일까. 점점 안좋은 생각에 빠지면서 머리가 둔해져서 뇌를 꺼내서 씻고싶은 느낌이 들었다.
서랍에서 두통약 두 알을 꺼내 먹고는 물을 마셨다. 길쭉한 흰 알약은 사실 크기가 좀 큰 편이라 먹기 부담스러웠다. 두통약 갯수가 늘어서 빨간색 동그란 알약도 번갈아가며 먹고있다. 그래도 계속 늘어만 가는 두통의 원인은 그 아이 이지만.
꽉 끼는 헬멧을 쓰고 있는 느낌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계속 생각하고 계속 슬퍼하고 계속 안좋은 쪽으로만 연상이 된다. 친근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었던 적이 많이 있다. 종종도 아니고 많이 있었다. '나'와 친하려고 친한 게 아니라 집안이라거나 금전적인 이유, 그리고 내 옆자리를 노린 여자들. 부인이 되면, 그 집안이며 금전적인 모든 부분이 손에 들어오는 그 욕망의 빛을내며 달려드는 여우들은 사실 구분하기 쉽다. 뻔하니까. 하지만 그런것보다 내가 좋아하게 되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상대의 감정에 내가 무감정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 감정이 부정당하는 건 어느 누구라도 힘들 것이다. 스토커든, 팬이든. 그 선을 넘어선 안되지만 그 선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일은 자주 있다. 마음이 가는 일은 자주 있다. 하지만 그걸 먼저 표현하는 일은 잘 없다. 아무래도 이런 저런 일을 겪은 어른이라는 자리는 그리 쉽게 마음이란 걸 주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어른이 되도 어린애 같은 마음이랄까. 마음을 형상화 한다면 기체같은 게 아닐까. 드라이아이스라거나. 나에게 있을 땐 고체의 형태를 띄고 있다가 적정온도가 되면 그에게 가버리는.
꿈은 이루어진다. 이루지지 않을 꿈이라면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게 악몽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다. 그냥, 이 꿈에서 지겨운 알람소리와 함께 꿈을 깨고 싶다. 하지만 꿈에서 깬다면 넌 없겠지. 그런... 순간의 꿈이었으면 좋겠다.
가쯩또 미깡 을 꺼내주었다. 어릴때부터 많이 먹긴 했는데, 히로한테 받으니까.. 특별한 거 같다.
"어.. 고마워"
생각지도 못하게 희죽 하고 웃은 것 같다.
감자칩을 껴안고 하드를 물고가는 게 어린애같아서 귀여웠다.
"과자 한봉지면 안부족해?"
"밥 먹을꺼니까, 괜찮아."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아이스바를 꺼내서 한 입 베어물었더니 차가움이 밀려와서 그냥 핥아먹기로 했다.
"응.. 밥은 뭐 먹을래?"
"고기"
"무슨 고기?"
고기인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게 더운 열기 랄까, 에어컨 때문에 그리 덥지 않을텐데도 냉동고보다는 충분히 더운 곳이라 녹아흘러내렸다. 칠칠치 못하게 손을 버려서 손을 쪽쪽 빨고 있었다.
"어... 돼지고기?"
한심하게 보였는지 한참 쳐다보는 것 같아서 손수건으로 닦고 싶었지만 안타깝게 주머니에 없어서 가운으로 닦고 싶지만 오렌지색 물이 들까봐 다시 손을 핥았다.
"어제 소고기 먹었으니까, 오늘은 돼지고기."
"삼겹살?"
"그거 많이 들어봤어. 맛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그거 먹어?"
"응 그거, 먹으러 갈래?"
아무 생각없이 외출하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말실수 한 것을 바로 정정했다.
"더우니까, 그냥..."
저녁을 같이 먹는다는 건.. 그런 의미도 있는 거니까.
"....그래."
뭔가 많이 서운한 모양이다. 같이 데려나가서 먹이고 싶은데. 데려 들어올 자신이 없다.
"맛있다고 하니까... 먹어줘야지."
"응?"
데이트 신청 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건지 데이트 승락을 하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삼겹살. 맛있다고 얘기 들었어. 그런건 먹어줘야 된다고."
"아, 응... 그치."
사오면 되는 거겠지?
"오늘 저녁이지? 맛있겠다."
"응."
"병실에서 먹는거야?"
"가서, 먹고 싶어?"
멈칫, 가서 먹고 병실로 돌아올 수 없을꺼야.
"나가도 돼?"
"응. 다 나았으니까."
내가 가자고 한 게 아니다라고 검은 마음이 외치고 있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 것도 히로, 가고 싶어하는 것도 히로.. 둘만 가면 정말 병실로 들여보낼 자신이 없었다.
"가, 간호사들이랑 같이 갈까?"
"누나들 바쁘지 않아?"
"퇴근하는 사람들이랑."
말려줄 사람들이 있으면 괜찮을거야. 히로 전담 간호사들 고기도 먹이고 히로도 삼겹살 먹이고..
"나는 상관없어."
"그.. 그래..?"
갑자기 아쉬웠다. 둘이 먹자고 했으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직은.. 그런 호감도는 없는거겠지.
"히, 마에다군 사복 있던가? 보호자가..."
입원할 때 엉망이라서 옷들은 다 버렸던 것 같은데.. 보호자가 주고간거 없나?
"어.... 찾아봐야 될 것 같은데, 없을껄?"
"없어? 옷 사러갈까?"
"어... 비서님들 부르면 돼"
"그냥 퇴원 선물 이라고 생각해."
가볍게 선물하겠다는 말이었는데, 말 없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포기한듯이
"...알았어."
"아니, 싫으면 말고..."
옷은 벗기려고 선물하는 거지만.. 뭐 그럴 마음은 충분히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 정말 아닌건가..
"...아냐. 괜찮아. 미리받고 좋은데."
"지금 나갈까?"
"....의사 맞아? 일 안해??"
농담처럼 걸어왔다. 할 일 없긴 하지만.
"난 별로 안바빠."
봐야하는 환자가 원래는 없는데 히로는 억지로 내가 잡아둔거니까.
"하긴 나 챙겨주느라 안바쁘지"
"응 히로만 챙기면 되~"
아, 실수.. 히로라고 불러버렸는데.. 그리 놀란 기색은 없는 거 같다. 괜찮은건가.. 히로라고 불러도..
"다른 환자들이 섭섭해해"
"다른 환자 없는데?"
"없어? 쌤 날탱이 아냐~"
"응. 외과치료 끝나면 원래 내과의사가 담당하니까. 난 내 환자 없어. 종종 수술이나 들어가지."
"어...."
"왜?"
내가 말실수 했나? 너만 보고 있어.. 이런거 너무 무거운가..
"농담을 다큐로 받았어."
"심각해?"
"아니. 그냥 되게 진지해."
"진지해? 내과 의사가 나아?"
외과의라서 별론가.. 원래 내과 의사가 봐줘야 하는건데. 재활의학과쪽이랑..
"어???? 쌤이 진지하다고."
"이제와서 담당의사 바꿔달라면 퇴원시킬꺼야."
".... 그럴 생각 없어. 그냥 쌤이 진지하다고 말한거야."
뭐가 그리 진지하다고 말하는거지?
"내가 진지한거야?"
"....... 그렇지. 내가 몇시에 자는지 체크할 정도로 열심히잖아."
그건 내가 니 방에 들어갈려고 물은거고..
"그건 체크해야지. 얼만큼 먹는지 얼만큼 배출하는지 열이나 아픈데 없는지."
"....... 그러네."
"나 히로 주치의야."
잘난척하듯 배를 내밀며 말했는데 그건 별 소용 없었던 모양이다.
"알아. 내 담당의사쌤이잖아."
"응. 담당의 몸무게 변화나 키나 그런거 다 알지"
"다 알아?"
"응 다 알아"
"한 번 말해봐. 나 키 컸어? 얼마나 컸어?"
"2cm?"
"뻥치시네."
"177이야 재볼래?"
"....진짜야?"
"응. 저쪽에 검사실 가서 볼래?"
"어.. 만약 2센치가 아니면 어쩔래?"
"아니면 뭐해줄까?"
그냥 뭐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해주고 싶은데 싫다고 하는 것 보다 이런 가벼운 농담에서 내기를 해서 지면 해줄게. 근데 키가 큰 건 맞는데. 내가 이기는 내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음..... 나 초밥사줘."
"그래"
검사실 앞에 키재는 곳에 올라가더니 자동으로 몸무게와 키를 측정해주었다. 키가 2cm가 큰 177cm이라 나오니 놀란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어... 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 알아? 최근에 검진했잖아?"
퇴근전에 최종검진 하는데 신장이며 체중이며 다 쟀었는데.. 기억 못하나? 아직 어린데 그럴리도 없고..
"왜?"
"나는 쌤이 척 보고 아는 줄 알았지!!"
"나 그냥 인간이야. 척 보고 어떻게 알아?"
"의사니까? 전문가니까.. 암튼 아는 줄 알았는데 뭐야. 내기의 의미도 없었잖아."
"스시 사줄게. 내일 점심?"
"쌤이 이겼는데?"
"이긴사람 마음이잖아?"
내기에서 이긴사람 마음인거지. 그런거잖아? 우기면 되는거겠지.
"아... 그런거야?"
"그런거 아냐?"
"진 사람이 이긴사람 소원 들어주는 건 줄 알았어."
히로가.. 소원 들어주는 거야?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려나.. 더 싫어지지 않으면 다행인건데..
"소원이 스시 사달라는 거면 너무 소박한 거 아냐?"
"더 큰 소원도 들어줄 수 있어?"
"들어줄게."
".....무슨 소원 빌지 알고."
"뭐든지."
"그리고 지금 내기. 내가 졌으니까 내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음.. 내가 히로 소원주는게 소원이면? 소원 강제로 말하게 하는게 소원인가?"
피식 웃었다. 왜 웃는거지..?
"알았어. 그럼.... 내 생일에 케이크 사줘. 그냥 배달만 해줘도 되니까."
"그건 원래 사줄려고 했어. 딴거."
"어? 사줄려고 했어?"
"응. 금요일에 바쁘냐고 물어봤잖아."
"아..."
"케이크 주문해뒀으니까 취소하면 안되."
"케이크 초도 18개 챙겨주라."
"그래."
"쌤이랑 누나들한테... 어..."
"응?"
왜그러지..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는 건 당연한건데.. 뭘 머뭇거리는 거지..?
"축하...... 시간 없으면 안해줘도 돼."
"금요일에 바빠?"
"아니."
"같이 외출할건데."
"어디로?"
"어제 스테이크 먹은 거기. 정장 있지?"
"어, 있어."
"정장 입고와. 고기 사줄게."
"어? .......어!"
"생일도 챙겨주고 착한선생님이지?"
싱긋 웃으며 호감도 올리려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히로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킨십은 이정도만... 이정도는 괜찮았으니까. 끌어안고 싶지만 이정도만 이라고 참고 있었다.
"어.. 존나 착해."
"퇴원 축하로 옷도 사주고."
"선물이라면서 되게 생색내네"
히로가 쳐다보면서 생색낸다고 하니 그저 웃음이 났다. 챙겨준다고 생색낼 생각보단 그냥 챙겨주고 싶은건데.
"뭘 더 해주고 더 생색 내야겠네."
"뭘 더 해주게?"
피식 웃었다. 왜 계속 웃는거지..?
"다 해주게."
"불도 붙여줘."
"응. 불 다 끌 자신있어?"
농담을 곁들여 내가 피식 웃었다. 히로, 귀여워.
"어, 당연하지."
"침 다 튀겠네. 케익 혼자 다 먹어."
"그럴거야. 쌤이 달라고 해도 안줘."
"다 먹어."
"그럴거야. 다른사람 안줘."
"그래, 다른사람 주지말고 혼자 다 먹어."
내가주는 첫 생일선물이 히로가 원하던 생일 케이크이란게 너무 기쁘다. 그걸 다른사람 안주고 독점해서 혼자 다 먹겠다고 하는 것도 귀엽다. 날 가지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런건 모르겠지? 히로 생일도 이제 곧이다. 여름 출생 아이는 강하다. 히로는 강하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오늘 밤에도.. 잘 자는지 들러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