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랄까. BBS오프모임이랄까.. 그런곳에 가게 됐는데 물론 내가 돈이 많다거나 그런걸 아는 건 아니고. 뭐 쨌든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갔는데, 정확한 장소를 몰라서 그 주변에 어물쩡거리고 있었는데 꽤 귀여운 사람이 뒤를 돌아본거야. 그 사람이랑 눈을 딱 마주쳤고. 그냥 길 가는 사람이었는데 아 귀엽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임장소를 갔더니 떡하니 있더라고. 근데 그 모임에서의 내 인상이 별로였는지 계속 그 사람은 주최자 뒤에 숨기만 했었어.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었고, 그래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한가했었던 것도 있고 개개인에게 같은 연락을 했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에게선. 시간떼우기용으로 적당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걸 낚아챈개 나랄까?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가까워지고 자주만나고 그랬는데 상대가 대입준비며 뭐 그런걸로 소원해졌달까. 나는 당연히 어려움없이 입학했는데 그 사람은 목표했던 학교 말고 다른곳에 붙어서 재수를 한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좋아졌는지도 잘 모르겠고, 왜 싫어진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계속 내 뇌에선 이 사람이 첫사랑이고 그립기도 하고.. 만나기 싫기도 한 그런 사람.
잠에서 깨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내 옆에 누군가 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착각, 꿈이 너무 현실이어서 그랬던건지, 현실이 꿈같아서 그런건지. 침대엔 혼자였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읏.."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을 때, 허리며 뱃속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은 어제의 밤에 현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휴지통 주변에 대충 버려진 콘돔이며, 콘돔이 분명 있는데도 생리통같은 알 수 없는 복통. 그리고 근육통.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어디선가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에서 전달되는 진동에 알 수 없는 흥분상태로 빠졌다.
"타치바나 입니다."
누구의 전화인지도 확인조차 않고 바로 받아버리는 건 나쁜 습관이겠지만 병원에서 급히 찾는 전화인 경우가 더 많아서 그냥 받아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쌤, 일어났어?"
"어, 응.."
누구 목소리인지 알 법도 같은데 모르는 거 같은 이 상황,
"아침까지 괴롭혀서 미안. 깼을 때 아무도 없는거.. 좀 그래서 전화했어."
멍한 아침에 이게 무슨소리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아.. 응.. 괜찮아."
괜찮다고 말은 하면서 지금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쌤, 진짜 괜찮아? 수업 째면 혼내니까 먼저 나오긴 했는데, 다시 집으로 가?"
낯설다. 이 낯선 광경에 어디서 언제 어떻게 말도 안되는 구분을 지으며 가정을 세워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정해진 답이 있었다.
"....쌤?"
그래도 날 부르는 게 따뜻한게 너무 좋다. 계속 듣고 있고 싶다.
"쌤, 괜찮아?"
"응.. 괜찮아."
전화너머로 보이지도 않을텐데 싱긋 웃어보였다. 괜찮은 상황인가? 내가 방금 전까지 남자랑 뒤엉켜 누워있었는데, 그게 너고, 네가 나한테 넣는 그런 상황이라는 거?
"안되겠다. 쌤, 수업째서 싫어하겠지만 집으로 갈게. 욕을 하든 때리든 맘데로 하고, 일단 집에서 보자. 끊어."
좀 더,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급하게 전화를 끊고 이쪽으로 오려는 모양이다. 침대에 대충 널부러져 누웠다. 아직 침구에 그 아이 체취가 남아 있었다.
"히로..."
목소리도, 체격도, 얼굴도 어른이 된 히로였다. 날 안고 있던 그 다부진 팔도, 키스를 하는 젖살빠진 그 얼굴도. 강하게 밀어 부치던 힘에 부서질 듯 끌어안고 흔들어대던 그 밤의 기억이 밤이 아니고 오늘 아침이었고, 아침까지 침대에 있다가 학교를 간 것 같다. 히로가 그만큼 컸다는 건 몇년이 지난걸까. 아니면 그냥 지금 내가 그저 꿈을 꾸고 있는건가.
금방이라도 올 것 처럼 말을 해서 전화를 끊어놓고, 몇 분 안지난듯 했지만 히로가 그립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일어나고 싶지만 손가락 까딱 하고 싶지 않았다. 베개를 베고 잤는지 베개에서 히로냄새가 잔뜩났다. 베개에 코를 박고, 지난 밤도 아닌 오늘 아침의 생생함이, 내 손으로 나를 쓰다듬으면서 히로를 그리워했다. 일어나기 싫은 게으른 손이 몸을 훑으며 그를 상기시켰다. 여길 이렇게 쓰다듬고, 저길 이렇게 쓰다듬으면 그가 나를 만지던 그 손길이..
"....히로...키...."
가슴께에도 손을 가져와 부비적댔다. 중심부에 손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몸은 금방 달궈졌다. 따뜻한 그 아이의 손은 차가운 어른의 손이 되었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차가운 손이 헤집는 몸은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그 손을 내 손으로 재현하려고 보니 그리 쉽지 않았다. 가슴돌기 주변을 맴돌던 손은 여기는 더이상 재미가 없어서 엉덩이로 옮겨졌다. 내 손인데도 언제부터 엉덩이를 쓰다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익숙치 않은 그 안쪽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느끼게 되었는지. 지금의 내 포지션은 어느 새 그 아이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몸이 되어서인지 가슴을 깨물리는 상상보다는 허벅지를 깨물리는 상상이 더 희열감이 컸다.
"흐응..."
소리를 올려보지만 내 손과 내 목소리에 나 혼자 흥분하기엔 조금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자위도 못하는 바보가 된 거는 틀림이 없었다.
"쌤!"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리면서 차가움이 밀려왔다. 후다닥 뛰쳐들어온 그의 부름에 부르르 무언갈 느끼기 시작하는 내 몸은 그를 재촉했다.
"히로..."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든건지 기절을 한건지 모르겠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흔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꿈을 꿨겠지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신다.
무슨 꿈이었을까.
그저 꿈인걸까.
그런꿈을 꾸고 다시 진료를 보고 수술을 하고 점심이며 저녁배달을 하고 전화도 받았다.
"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목소리보다 조금 높았다. 남성의 성대는 변성기 이후로 목소리가 그리 달라지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쌤?"
"어, 응.."
"바빠요? 방해되는 거면 전화 끊을게요."
"아, 아니. 무슨 얘기중이었지?"
히로와 전화중인데 딴남자 생각이라니. 아니 딴남자는 아니지 그것도 히로니까. 언젠가 먼 미래의 히로, 아니 내가 만들어낸 망상속의 히로키인가.
외출준비를 하며 환자복 입고 나가긴 좀 그런가? 싶어서 집에 가봤다. 어릴 때 입던 옷이 나올까 싶어서 찾아봤지만 전부 지금 입는 옷들 뿐이었다. 걔중에 좀 작았던 옷을 한 벌 갖고 히로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내 옷 입을래?"
게임기를 내려두고 날 본다.
"쌤 옷? ...그냥 이거 입을래."
"환자복 입고 밖에 돌아다니게?"
들고 있는 옷을 보더니 환자복 상의를 만지며 옷을 내려다본다. 몇번이나 세탁한 색바랜옷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환자복은 눈에띈다.
"뭐 어때, 괜찮아."
"엄청 눈에 띌건데? 뭐.. 괜찮으면 말고."
"...어떻게 가게?"
"내 차 타고. 내려서 백화점까지 한 10분? 정도는 걸어가야 되는데, 이거 입을래?"
여름용 가디건을 챙기긴 했지만 지금은 한 여름이고, 밖은 매우 더웠다. 환자다 보니 좀 더운걸로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 가디건을 건냈더니 받아들었다.
"....고마워."
"아, 더울려나.."
내 옷을 안입는다는 의미는 아닌 거 같으니..
"괜찮아. 에어컨 틀어줘."
"내가 말하는 건 밖에 돌아다니면 더울건데.. 아무리 여름 가디건이라지만.."
환자복은 위생적인 면이 있지만 그리 바깥환경에 대해서 쾌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병원 안에 있으면 시스템 에어컨에 잘 조성된 환경이라 괜찮지만.. 머뭇거리며 가디건을 입더니,
"뭐, 오래 걷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말한다.
"....계속 병원안에 있어서 모르나본데.. 밖, 많이 더워. 30도야."
챙겨온 반팔과 반바지를 건낸다. 건낸 옷을 힐끔 보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알았어."
갖고있던 옷을 낚아채던지, 병실에서 날 내보내면 될 일을 옷을 갖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풉.. 귀엽네"
반바지라고 집어온 바지는 왜때문인지 칠부가 되어있고, 상의셔츠는 아빠셔츠가 되어 있었다.
"쌤.. 쌤이 커서 그렇잖아."
"나 그리 큰 편은 아닌데.."
얼굴이 빨개져서 호소하는 그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난 큰편이 아니라고 발뺌해봤자 일본남자가 180넘는 상황에서 큰 편이 아니라니.. 음..
"나.. 나보다는 크잖아. 그리고... 곧 클거야..."
큰소리를 치다가 목소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아진다. 그래, 쑥쑥 커야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쑥쑥 커야 될건데"
"놀리냐. 당신보다 클거야."
궁시렁 거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그래, 얼른 가야겠다. 바지 흘러내리진 않아?"
"그정도는 아냐. 빠.. 빨리가자!"
"그래."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게 더 귀여웠다. 손을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같으면 싫다고 손을 빼거나 뿌리칠 것 같은데 조용히 잡혀있다. 싫지 않은 거겠지? 놀란 표정이라 손 잡은게 불편한건지 안색을 살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어서 아랫쪽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그게 더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다.
"응? 왜 그래?"
"아.. 아냐."
"그래? 갑자기 외출해서 긴장 한건가 싶어서. 아프면 얘기해."
"아.. 알았어."
맞잡은 손은 애기라서 그런지 체온이 높아서 그런지 따뜻했다. 내 손이 찬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따스함이 전해지는 게 너무 좋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주차장에서 내 차를 찾아서 탈려고 그 앞에 섰을 때, 이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상실감에 멍하니 서 있었다. 놓기 싫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찰라에 손을 놓고 왼켠에 선 히로를 봤다.
"풉"
"이쪽이 운전석이네?!"
보통 운전석이 오른편에 있지만 왼편에 있는 걸 보고 역시 남자애다보니 이런 차에 흥분하며 좋아하는 게 보였다.
"아, 응. 독일에서 타던거 그대로 들여와서."
"독일에서 살았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할머니가 외국인이라는 얘기까지 하면 큰일이라도 나겠네.
"응. 잠깐. 에.. 의학연수?"
부러움과 신기함과.. 뭐라고 표현해야될지 모르는 고양감? 귀엽다. 눈 앞에 케이크 쇼케이스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와아, 혼자?"
"어, 응.. 혼자"
"와아.. 좋았겠다."
"글쎄.. 잘 모르겠어."
"왜? 혼자 살면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잖아."
히로는 아마도 집안의 간섭이 제일 귀찮은 모양이다. 나도 그런때가 있었나.. 하고 고민해보지만 그런적이 없었다. 우리집은 방임주의니까. 무슨일을 해도 혼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란 존재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혼자사는데?"
"...부럽다."
부럽다는 얼굴을 하며 입에서 부럽다 하고 나와버렸다.
"같이 살래?"
"내.. 내가 왜 같이 살아!!"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냥 건낸 말이지만 히로의 반응은 역시 귀여워.
"가.. 가자.."
차 앞에서 한참 얘기 하다가 드디어 차 안에 들어왔다. 싱글거리며 운전을 하는데 시선이 엄청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차 내부를 둘러보는 눈빛이며, 운전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야? 반한거야?
"왜 그래?"
장난스레 말을 건냈다. 아직 '같이 살래?'라는 말에 반응한 자신이 부끄러운건지,
"아! 그냥. 신기해서.. 구경한거야."
라고 둘러댄다.
"차가? 별로 특별할 거 없는데.."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것도 신기하고. 맨날 이거 타고 먹을 거 사러 갔엇어?"
"응. 반대쪽에 있으면 운전하기 불편해서."
물론 도로법도 좀 달라서 운전하기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도로폭이 좁다. 한참을 물끄러미 신기한듯 쳐다보길래 싱긋하고 웃어보였다. 사실 이 차 말고 다른차도 많이 있다는 건 당분간 비밀에 부쳐둬야 겠다. 정체구간에 정체도 없어서 예상시간대로 도착했다.
"다왔네."
주차장에 들어가서 빙글빙글 돌며 주차할 곳을 찾았다. 주차를 하고 내리려고 보니 뭘 신기한 게 있는지 두리번 거리며 벨트를 풀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손을 낚아챘다.
"헤메면 안된다. 눈에 띄긴 하지만."
이세탄 주차장에서 내려서 마루이 아넥스까지 걷는데 대략 20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환자복이 아니긴 하지만 옷이 아무래도 큰 편이랄까. 패셔너블 하다고 하면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 손 잡아놓고 어떻게 헤메."
손 잡은 게 불만은 아닌 듯.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가볍게
"그래"
라고 흘려들었다. 한여름의 아스팔트 거리, 그림자 없는 직사광선의 한 여름의 더위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도 히로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내 손의 차가움을 녹여줬다.
"저기다!"
".....저기가?"
"응."
건물 아웃테리어보다 아무래도 내부에 들어갔을 때의 화려함은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패션관련 편집샵들이 부분 부분 위치를 하고있는 중에 1층은 모자며 악세사리류가 주류였다. 히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이었다.
"유니클로 가는 거 아니었어?"
"유니클로? 그게 어딘데?"
"여기저기. 체인점이라서.. 여긴 너무 비싸잖아."
"비싸? 그런거 신경써?"
입고있는 셔츠가 얼마인지 비밀에 부쳐둬야 될 것 같은데...
"..... 나는 쌤이 간단한거 사줄 줄 알았는데.."
"간단하달까.. 그냥 내가 입고 싶은데 못입는거 사주고 싶어서, 엘리베이터 저쪽이다~"
손 잡고 끌고갔다. 엘리베이터에 둘이서 두근거리며 데려갔다. 내 기대에 반하는 표정의 히로가 보였다. 부담스럽다는 게 얼굴에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옷들이 보이니 놀란 표정이다. 다른 가게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둘러보지만 그리 넓지않은 작은 관이라 한바퀴 휙 돌아서 다시 내쪽으로 돌아왔다.
"여기, 이거."
".......이거?"
인터넷으로 둘러보다가 어쩌다 보게 된 귀여운 옷이라 히로 생각하면서 선물로 사둘까 하던 옷이었다. 세일러 셔츠에 리본, 그리고 호박바지에 서스팬더까지 완벽한 귀여움이었다.
"응 이거! 귀여운데! 나한테 안맞아."
".....코스프레냐"
"아니 생활복"
내 눈치를 한껏 보다가
"귀엽기는 한데, 나랑 안 어울려."
거절했다.
"아니야! 어울려! .....입어봐주면 안되?"
"어딜봐서 어울리냐!!!"
싫은가보다. 싫다는데 강요할 순 없지.
"싫으면 말고."
"좀 더 무난한 거 없어?"
"무난한거.. 음.. 이게 그나마 무난한 쪽인데.."
반바지에 세일러 칼라, 서스펜더 조합이 귀여워서 히로가 입어줬으면 좋겠어서 데리고 왔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왜 여자애옷을 입힐 생각이냐?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몇마디 궁시렁 거렸더니 눈치를 살피더니 주저하다가 입을연다.
"내가 입기엔 너무... 귀엽, 잖아."
"히로도 귀여워!!"
"미쳤냐!!!!!!"
"귀여운데..."
당연히 귀여우니까 귀여운 옷을 입히려는 거지!! 라고 하고 싶은데 그 말을 제대로 못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싫은건지,
"...노.. 놀리지마!!"
하고 소리친다.
"따.. 딴거. 딴거..."
"딴거?"
"딴거."
원래 여성복 코너 중에 유니섹스인 남성복인 터라 남자애가 입을만한 옷은 그다지 없는편이다. 원피스를 입어주면 더 귀엽겠지만 그렇게까지 여장을 강요할 생각은 없고, 그냥 반바지에 세일러...
"꼭, 이거 입어야 해?"
미니헷까지 써주면 완벽하게 귀엽겠지만 반바지엔 거부감이 없고, 세일러 칼라가 너무 귀여운건가...
"싫으면.. 말고.."
아무리 뒤적여봐도 저거만큼 무난한 옷은 없고, 귀여운 옷도 없고, 입어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정도 옷에..
"유니클로가 어딘데."
"화났어?"
"아니,"
"....화났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유니클로 옷이면 되는거지?"
"어."
"그게 어딘데?"
"이 근처에."
"뭐야? 너도 몰라?"
"...나라고 유니클로 매장이 어디인지 다 아는 줄 아냐?"
할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유니클로 라고 검색하니 신주쿠 역 근처에 매장이 있는듯 보였다. 여기옷은 별로고 처음부터 유니클로 옷을 원했으니 그리로 데리고 갔다. 여유없는 걸음걸이로 끌고가듯이 유니클로 매장으로 왔다.
"....쌤.... 그...."
"여기네."
짜증과 울컥함이 눈물이라도 날까봐 애써 참아본다.
"맘에드는 걸로 골라와."
매장을 둘러볼 생각도 없이, 입구 한 켠에 있는 결재카운터 앞에서 옷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다. 잠깐 기다리기 금새 가져왔다.
"이거면 되?"
"어."
바로 계산하고 옷을 건낸다. 계산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깔끔한 흰색 티셔츠에 적당한 면바지를 입고오니 별거 아닌데 기분이 풀렸다.
"배, 고파?"
"어."
"바로, 고기 먹으러, 갈까?"
괜시리 화난게 미안해서 사과할 마음으로 카페를 갈려고 먼저 물었다. 배고파서 고기 먹고 싶다면 먼저 고기 먹으러 가고, 아니면 카페가서 케이크 한 점 사주고 싶었다.
"잠깐, 어디 좀 들르면.."
"가고 싶은 데 있어?"
"어, 응.. 들려도 되?"
"그래."
아까와는 다르게 히로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데려간다. 여기 였던거 같은데..
"딸기가 없네.."
딸기가 없다는 말에 점원이 다음달에 여름딸기가 나온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딸기케이크가 없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생일 케이크 예약 되죠?"
물론이죠 라고 대답한다. 히로 케이크 여기서 예약 하고, 또.. 초코 있는데 초코는 싫으려나..
"맘에 드는 거 없어? 딸기 말고는 안먹어? 초코도 있고.."
"아니 초코도 좋아."
"마실꺼는?"
"이거...."
부끄러워하며 복숭아주스를 가리킨다.
"....초코 케이크, 복숭아주스, 다즐링... 케이크 다른 거 더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
"... 풉...."
초코 케이크에 복숭아주스, 그리고 고기. 인가.. 단순함에 너무 귀여워서 카운터 앞에서 배잡고 웃었다. 너무 귀여운 내 히로..
"고기는 나중에 사줄게. 여기서 파는걸로."
무의식적으로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 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 실수가 부끄러운건가.. 귀엽다. 더 끄집어내긴 힘든듯 그냥 이렇게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음료와 케이크는 바로 서빙되어 나오고, 그걸 말 없이 냠냠 잘먹고 주스도 쪽쪽 다 빨아먹고는 여유가 생긴건지,
"쌤 안 먹어?"
라고 질문이 날라왔다.
"먹고 있는데?"
케이크는 손도 안대고 있는 걸 안건가, 히로가 많이 먹는 게 더 좋은데. 초코케이크 두 조각 시킬걸 그랬나.
"맛있었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까 화난 마음이 히로 잘 먹는 모습에 다 녹은 것 같다.
"어어.. 맛있어서.."
"고기 먹을 배는 남아있는 거지?"
"어어!!"
"다 먹었어? 슬슬 갈까?"
"응."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고 온 옷이 든 가방을 챙기며 머뭇거리며 일어난다.
"저기, 잘, 먹었어."
손을 잡았더니 그 손을 뺀다.
"쌤, 손.. 어, 언제까지 잡을꺼야."
"지금껏 잘 잡혀 있다가, .......안되는 거였어?"
"......그야...... 사람들 눈도 있고, 그런.... 사이도 아니고."
"안되는 거였구나.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손을 놓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마,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 내가 너무 정신없게 했나보네."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아냐!"
"그래 미안 이젠 안잡을게. 그럼 됐지?"
더이상 담담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 주차된 차를 꺼내와서 히로를 태웠다. 행동 하나에 감동받고, 행동 하나에 우울해지고, 말 한마디에 슬퍼진다. 거부하는 움직임에 화가나고, 싫어하는 말에 미워진다. 이 응어리진 마음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거창할 것이고, 그저 질투라고 보기엔 그 상대가 없다. 그냥 나혼자 짜증나고, 혼자서 화내고, 혼자서 우울하고 나혼자 그러기로 했다. 이건 내문제고, 이 아이와는 관계없다. 내가 정리하면 되는 그저 외사랑이다. 퇴원하면 나아질 것이다. 안보면 잊혀질 일이다. 지금부터 마음을 조금씩 정리해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안되고, 바래서도 안된다. 싫은 사람한테 이상한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버리고 싶겠지. 그저, 그냥... 곁에 있을 때만 잘해주면 되겠지.
품속에서 자고있던 히로가 깬 듯 했다. 품속에서 부시럭 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른척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어쩌면 자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뭐랄까. 자고 있는데 깬 듯한 그런? 새벽녘엔 좀 빨리 깨는 편이다. 밤에 일찍자는 이유가 피곤해서 그런 것도 있고, 집에서 일찍자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났으니까. 대신 엄마가 자는 새벽엔 뭐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날만한 무언가는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가위 눌린듯한, 저혈압이라면 흔히 겪는 정신은 멀쩡히 깨있지만 몸은 덜깬듯한 그런 느낌의 새벽녘. 품에서 빠져나가는 히로를 끌어안을까 하다가 움직이지 않는 몸이 말을 안들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빛에 혹시나 내가 깰까봐 배려해주는 게 너무 귀엽다. 피식, 하고 웃는 소리도 들린다. 나를 쓰다듬는 느낌도 든다. 내가 좋은 거겠지? 좋아서 만지는 거겠지..?
눈이 아닌 전신의 감각으로만 무언가 다가와 쓰다듬고, 숨결이 가까워짐이 느껴졌다.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 그리고 그 꽃잎은 금새 멀어졌다. 놀라서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키스 해달라고 웅얼거려 보았지만 몸이 아직 말을 듣지 않았다. 멀어져서는 가까이 올 기미가 없다. 가까이 온다면 품속에 가두고 모닝 섹스라도 하고 싶은 마음인데 좀체 움직임이 없다. 놀란건가?
한참 멀어져 있다가 좀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다가왔다. 자고있는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 코, 볼을 쓰다듬고 입술을 다시 터치한다. 가위 눌린듯한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근거림이 나한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히로의 심장소리가 아니라 내 심장소리인가? 심장의 고동은 높아지고 귀 옆에 심장이 있는 거 같은 기분나쁨이 밀려왔다. 소화가 안되는 꽉막힌 느낌, 심장이 위장 옆에 있어서 그런건지, 단순한 소화불량인지 모를 압박감. 생각지도 못한 신음이 튀어올랐다.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멈칫-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잡아 끌어서 품속에 꼭 가두고 싶다.
멀어진다.
아직 자고 있는데도 절망감에 빠져 있는 힘껏 얼굴을 찡그려본다. 뭐라고 잔소리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간의 주름에 손이 닿는다. 뻣뻣한 몸은 그 손짓에 자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손을 덥썩 잡았다. 그 손에 의해 마법이 풀린 것 같았다. 눈을 떴다.
"잘 잤어?"
싱긋 웃어 보였다. 기대했던 만큼의 놀람이 얼굴로 전해지고, 부끄러움에 도망갈 기세였다. 그 손을 잡아끌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균형을 잃고 이쪽으로 쓰러진다. 그걸 이용해서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다. 입술이 닿을 때 부터 혀가 닿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을 지금 쏟아낸다. 입술과 입술이, 혀가 얽히면서 내는 마찰음, 침이 엉기며 내는 미끈한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끌어안고 몸을 부비적댄다. 뜨끈한 중심은 기다린 듯 고개를 들어 서로를 찔러댔다. 밀어내려고 필사적인 팔을 끌어안고 온몸으로 부비적댔다. 버럭 소리칠려고 하는 입안은 혀로 가득차서 아무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금새 녹아내려 향긋한 신음이 귀에 녹아들었다. 입김이 닿을 듯, 귓가를 속삭인다. 종종 기분좋을 때 귀를 핥아주는 게 너무 좋다. 언제부터 내 성감대가 귓불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걸 개발한 건 다른사람도 아니고 히로다.
"히로ㅡ"
배아랫쪽에서 뜨거운 눈물이 올라와 왈칵 울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어젯밤의 얽힘은 아침까지 계속되며 손을 잡았다.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날이었다. 어느 새 히로는 쑥쑥커서 내 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그 전엔 그리 욕심내지 않았는데 날 리드하고 자기가 하고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걸 받아들이고, 그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어젯밤에 처음, 날 히로에게 주었다. 버진이 아니라는 점이 좀 애석했지만 사귀면서 처음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아마 그래서 먼저 잠들고 늦게까지 아침잠에 빠졌고, 처음있었던 '그 일' 때문에 약간 가위에 눌린 듯 하다.
이제 괜찮다. 나에겐 마법사이자 해결사인 히로가 있고, 서로 사랑해서 하는 쌍방을 위한 섹스이니까ㅡ
내가 가르쳐준 자잘한 밤의 유희는 내 몸위에 펼쳐졌고, 그걸 받아들이는 일은 쉬웠다. 좋아한다는 표현이고,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히로를 믿고 받아들이고 그걸 즐긴 첫번째 밤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가죽공방에 물어서 은세공공방을 소개받았다. 펜던트? 팔찌? 어디든 참으로 걸 수 있게 작은 사이즈로 어떻게 만드는지 배웠다.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첫 작품 치고는 잘만드는 편이란 소릴 들었지만 겉치레로 들렸다. 소개받을때 저기 외과의 겸 오너 아들이란 소릴 들었겠지. 양각틀보단 음각으로 이름을 새기고 싶었다. 양각이면 바로 티나니까. 약간 사인처럼 흘려 쓴 그 상대의 이름위에 완성기념으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ㅡ My kitten, Hiroki
쓰고나서 좀 후회했지만 줄지말지도 사실 고민이다. 키튼이라니... 처음 만든건 그렇게 넣어두었다. 그 다음에 좀 더 연습해서 만들다가 살짝 손에 상처가 낫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계속 신경쓰였다. 아무래도 손을 예민하게 쓰는 직업이다 보니 한동안 계속 신경쓰였지만 결국 완성했다.
ㅡ Shoo Tachibana
내꺼에 이름쓰는 감각으로 독점욕이 폭발했다. 갖고싶다 내꺼하자. 화내려나.. 요즘은 괜찮아보이던데.. 밤에 찾아가는 걸 알게되면 어떤 반응일까도 궁금하고. 갖고싶다. 내꺼라고 이름 써놓을 수 있을까.
두번째 작품도 결국 넣어두었다.
언젠가, 하나쯤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쩌면 하나도 못 줄 수도 있고, 둘 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곁에 있고 싶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헤어진다고 해서 슬퍼 죽을 정도도. 순간은 잠시 힘들다가도 그리고 조금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그게 사랑이고, 헤어짐이고 잊혀짐이다.
할 일도 없는 책상에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깨에 기대서 앞으로 꼬꾸라진다. 외과의사의 책상이란 의미도 없이 아무것도 없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술을 할 것이라는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일 외엔 데스크워크란 거의 없고, 수술대 위에서 잠든 환자를 수술하는 게 본 업무이다. 내과의사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어떤 약물을 얼만큼씩 쓰는지 오더도 내고, 환자의 상태도 확인한다. 사실 내과의에게 맡겨야 하는 일을 억지로 보고있는 환자가 한 명 있다.
마에다 히로키
몇 달 전에 응급수술로 입원한 환자로, 그 마에다 의원의 둘째아들? 셋째아들? 인가 라고 한다. 아마도 병원에서 보단 VIP주최 파티장 같은 곳에서 스쳐지났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자고있는 그 아이를 손 댄 건 확연한 범죄다. 동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책임은 범한 자가 지게 되어있다. 수술 역시 그러하다. 수술동의서를 보호자에게 받아내는 일도 그 수술에 대한 설명과 그에대한 리스크를 보호자에게 알려주고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겠다는 의미에서 동의를 받는 것이다. 얼마의 확율로 사망할 수도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의사인 내가 아닌 보호자에게 책임을 넘긴다는 의미이다.
이 아이의 보호자, 한 번도 본 적 없다. 사진이나 티비라면 본 기억이 어렴풋이 있을지도 모른다. 워낙 유명인사다 보니, 아니 선거철엔 시끄럽게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있는 사람이다보니..
그것보다 곧 퇴원이네. 보내고 나면 시원섭섭하려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큰 존재였을까 하는 우려를 하면서 퇴원준비를 하고 있다. 오히려 바쁘면 나을 것 같은데. 일에 치여서 제대로 못봤다면. 시간이 남으니 딴생각이 들고 그게 주로 나쁜기억들이다. 그래서 우울해진다는 게 정설일지도 모른다.
보내기 전에 고백이라도 할까. 마지막으로 보게 될건데, 고백 한다고 바로 굳은 표정 지으면서 그렇게 안봤는데 라며 포비아 같은 행동을 보일까. 점점 안좋은 생각에 빠지면서 머리가 둔해져서 뇌를 꺼내서 씻고싶은 느낌이 들었다.
서랍에서 두통약 두 알을 꺼내 먹고는 물을 마셨다. 길쭉한 흰 알약은 사실 크기가 좀 큰 편이라 먹기 부담스러웠다. 두통약 갯수가 늘어서 빨간색 동그란 알약도 번갈아가며 먹고있다. 그래도 계속 늘어만 가는 두통의 원인은 그 아이 이지만.
꽉 끼는 헬멧을 쓰고 있는 느낌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계속 생각하고 계속 슬퍼하고 계속 안좋은 쪽으로만 연상이 된다. 친근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었던 적이 많이 있다. 종종도 아니고 많이 있었다. '나'와 친하려고 친한 게 아니라 집안이라거나 금전적인 이유, 그리고 내 옆자리를 노린 여자들. 부인이 되면, 그 집안이며 금전적인 모든 부분이 손에 들어오는 그 욕망의 빛을내며 달려드는 여우들은 사실 구분하기 쉽다. 뻔하니까. 하지만 그런것보다 내가 좋아하게 되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상대의 감정에 내가 무감정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 감정이 부정당하는 건 어느 누구라도 힘들 것이다. 스토커든, 팬이든. 그 선을 넘어선 안되지만 그 선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일은 자주 있다. 마음이 가는 일은 자주 있다. 하지만 그걸 먼저 표현하는 일은 잘 없다. 아무래도 이런 저런 일을 겪은 어른이라는 자리는 그리 쉽게 마음이란 걸 주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어른이 되도 어린애 같은 마음이랄까. 마음을 형상화 한다면 기체같은 게 아닐까. 드라이아이스라거나. 나에게 있을 땐 고체의 형태를 띄고 있다가 적정온도가 되면 그에게 가버리는.
꿈은 이루어진다. 이루지지 않을 꿈이라면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게 악몽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다. 그냥, 이 꿈에서 지겨운 알람소리와 함께 꿈을 깨고 싶다. 하지만 꿈에서 깬다면 넌 없겠지. 그런... 순간의 꿈이었으면 좋겠다.
가쯩또 미깡 을 꺼내주었다. 어릴때부터 많이 먹긴 했는데, 히로한테 받으니까.. 특별한 거 같다.
"어.. 고마워"
생각지도 못하게 희죽 하고 웃은 것 같다.
감자칩을 껴안고 하드를 물고가는 게 어린애같아서 귀여웠다.
"과자 한봉지면 안부족해?"
"밥 먹을꺼니까, 괜찮아."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아이스바를 꺼내서 한 입 베어물었더니 차가움이 밀려와서 그냥 핥아먹기로 했다.
"응.. 밥은 뭐 먹을래?"
"고기"
"무슨 고기?"
고기인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게 더운 열기 랄까, 에어컨 때문에 그리 덥지 않을텐데도 냉동고보다는 충분히 더운 곳이라 녹아흘러내렸다. 칠칠치 못하게 손을 버려서 손을 쪽쪽 빨고 있었다.
"어... 돼지고기?"
한심하게 보였는지 한참 쳐다보는 것 같아서 손수건으로 닦고 싶었지만 안타깝게 주머니에 없어서 가운으로 닦고 싶지만 오렌지색 물이 들까봐 다시 손을 핥았다.
"어제 소고기 먹었으니까, 오늘은 돼지고기."
"삼겹살?"
"그거 많이 들어봤어. 맛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그거 먹어?"
"응 그거, 먹으러 갈래?"
아무 생각없이 외출하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말실수 한 것을 바로 정정했다.
"더우니까, 그냥..."
저녁을 같이 먹는다는 건.. 그런 의미도 있는 거니까.
"....그래."
뭔가 많이 서운한 모양이다. 같이 데려나가서 먹이고 싶은데. 데려 들어올 자신이 없다.
"맛있다고 하니까... 먹어줘야지."
"응?"
데이트 신청 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건지 데이트 승락을 하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삼겹살. 맛있다고 얘기 들었어. 그런건 먹어줘야 된다고."
"아, 응... 그치."
사오면 되는 거겠지?
"오늘 저녁이지? 맛있겠다."
"응."
"병실에서 먹는거야?"
"가서, 먹고 싶어?"
멈칫, 가서 먹고 병실로 돌아올 수 없을꺼야.
"나가도 돼?"
"응. 다 나았으니까."
내가 가자고 한 게 아니다라고 검은 마음이 외치고 있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 것도 히로, 가고 싶어하는 것도 히로.. 둘만 가면 정말 병실로 들여보낼 자신이 없었다.
"가, 간호사들이랑 같이 갈까?"
"누나들 바쁘지 않아?"
"퇴근하는 사람들이랑."
말려줄 사람들이 있으면 괜찮을거야. 히로 전담 간호사들 고기도 먹이고 히로도 삼겹살 먹이고..
"나는 상관없어."
"그.. 그래..?"
갑자기 아쉬웠다. 둘이 먹자고 했으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직은.. 그런 호감도는 없는거겠지.
"히, 마에다군 사복 있던가? 보호자가..."
입원할 때 엉망이라서 옷들은 다 버렸던 것 같은데.. 보호자가 주고간거 없나?
"어.... 찾아봐야 될 것 같은데, 없을껄?"
"없어? 옷 사러갈까?"
"어... 비서님들 부르면 돼"
"그냥 퇴원 선물 이라고 생각해."
가볍게 선물하겠다는 말이었는데, 말 없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포기한듯이
"...알았어."
"아니, 싫으면 말고..."
옷은 벗기려고 선물하는 거지만.. 뭐 그럴 마음은 충분히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 정말 아닌건가..
"...아냐. 괜찮아. 미리받고 좋은데."
"지금 나갈까?"
"....의사 맞아? 일 안해??"
농담처럼 걸어왔다. 할 일 없긴 하지만.
"난 별로 안바빠."
봐야하는 환자가 원래는 없는데 히로는 억지로 내가 잡아둔거니까.
"하긴 나 챙겨주느라 안바쁘지"
"응 히로만 챙기면 되~"
아, 실수.. 히로라고 불러버렸는데.. 그리 놀란 기색은 없는 거 같다. 괜찮은건가.. 히로라고 불러도..
"다른 환자들이 섭섭해해"
"다른 환자 없는데?"
"없어? 쌤 날탱이 아냐~"
"응. 외과치료 끝나면 원래 내과의사가 담당하니까. 난 내 환자 없어. 종종 수술이나 들어가지."
"어...."
"왜?"
내가 말실수 했나? 너만 보고 있어.. 이런거 너무 무거운가..
"농담을 다큐로 받았어."
"심각해?"
"아니. 그냥 되게 진지해."
"진지해? 내과 의사가 나아?"
외과의라서 별론가.. 원래 내과 의사가 봐줘야 하는건데. 재활의학과쪽이랑..
"어???? 쌤이 진지하다고."
"이제와서 담당의사 바꿔달라면 퇴원시킬꺼야."
".... 그럴 생각 없어. 그냥 쌤이 진지하다고 말한거야."
뭐가 그리 진지하다고 말하는거지?
"내가 진지한거야?"
"....... 그렇지. 내가 몇시에 자는지 체크할 정도로 열심히잖아."
그건 내가 니 방에 들어갈려고 물은거고..
"그건 체크해야지. 얼만큼 먹는지 얼만큼 배출하는지 열이나 아픈데 없는지."
"....... 그러네."
"나 히로 주치의야."
잘난척하듯 배를 내밀며 말했는데 그건 별 소용 없었던 모양이다.
"알아. 내 담당의사쌤이잖아."
"응. 담당의 몸무게 변화나 키나 그런거 다 알지"
"다 알아?"
"응 다 알아"
"한 번 말해봐. 나 키 컸어? 얼마나 컸어?"
"2cm?"
"뻥치시네."
"177이야 재볼래?"
"....진짜야?"
"응. 저쪽에 검사실 가서 볼래?"
"어.. 만약 2센치가 아니면 어쩔래?"
"아니면 뭐해줄까?"
그냥 뭐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해주고 싶은데 싫다고 하는 것 보다 이런 가벼운 농담에서 내기를 해서 지면 해줄게. 근데 키가 큰 건 맞는데. 내가 이기는 내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음..... 나 초밥사줘."
"그래"
검사실 앞에 키재는 곳에 올라가더니 자동으로 몸무게와 키를 측정해주었다. 키가 2cm가 큰 177cm이라 나오니 놀란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어... 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 알아? 최근에 검진했잖아?"
퇴근전에 최종검진 하는데 신장이며 체중이며 다 쟀었는데.. 기억 못하나? 아직 어린데 그럴리도 없고..
"왜?"
"나는 쌤이 척 보고 아는 줄 알았지!!"
"나 그냥 인간이야. 척 보고 어떻게 알아?"
"의사니까? 전문가니까.. 암튼 아는 줄 알았는데 뭐야. 내기의 의미도 없었잖아."
"스시 사줄게. 내일 점심?"
"쌤이 이겼는데?"
"이긴사람 마음이잖아?"
내기에서 이긴사람 마음인거지. 그런거잖아? 우기면 되는거겠지.
"아... 그런거야?"
"그런거 아냐?"
"진 사람이 이긴사람 소원 들어주는 건 줄 알았어."
히로가.. 소원 들어주는 거야?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려나.. 더 싫어지지 않으면 다행인건데..
"소원이 스시 사달라는 거면 너무 소박한 거 아냐?"
"더 큰 소원도 들어줄 수 있어?"
"들어줄게."
".....무슨 소원 빌지 알고."
"뭐든지."
"그리고 지금 내기. 내가 졌으니까 내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음.. 내가 히로 소원주는게 소원이면? 소원 강제로 말하게 하는게 소원인가?"
피식 웃었다. 왜 웃는거지..?
"알았어. 그럼.... 내 생일에 케이크 사줘. 그냥 배달만 해줘도 되니까."
"그건 원래 사줄려고 했어. 딴거."
"어? 사줄려고 했어?"
"응. 금요일에 바쁘냐고 물어봤잖아."
"아..."
"케이크 주문해뒀으니까 취소하면 안되."
"케이크 초도 18개 챙겨주라."
"그래."
"쌤이랑 누나들한테... 어..."
"응?"
왜그러지..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는 건 당연한건데.. 뭘 머뭇거리는 거지..?
"축하...... 시간 없으면 안해줘도 돼."
"금요일에 바빠?"
"아니."
"같이 외출할건데."
"어디로?"
"어제 스테이크 먹은 거기. 정장 있지?"
"어, 있어."
"정장 입고와. 고기 사줄게."
"어? .......어!"
"생일도 챙겨주고 착한선생님이지?"
싱긋 웃으며 호감도 올리려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히로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킨십은 이정도만... 이정도는 괜찮았으니까. 끌어안고 싶지만 이정도만 이라고 참고 있었다.
"어.. 존나 착해."
"퇴원 축하로 옷도 사주고."
"선물이라면서 되게 생색내네"
히로가 쳐다보면서 생색낸다고 하니 그저 웃음이 났다. 챙겨준다고 생색낼 생각보단 그냥 챙겨주고 싶은건데.
"뭘 더 해주고 더 생색 내야겠네."
"뭘 더 해주게?"
피식 웃었다. 왜 계속 웃는거지..?
"다 해주게."
"불도 붙여줘."
"응. 불 다 끌 자신있어?"
농담을 곁들여 내가 피식 웃었다. 히로, 귀여워.
"어, 당연하지."
"침 다 튀겠네. 케익 혼자 다 먹어."
"그럴거야. 쌤이 달라고 해도 안줘."
"다 먹어."
"그럴거야. 다른사람 안줘."
"그래, 다른사람 주지말고 혼자 다 먹어."
내가주는 첫 생일선물이 히로가 원하던 생일 케이크이란게 너무 기쁘다. 그걸 다른사람 안주고 독점해서 혼자 다 먹겠다고 하는 것도 귀엽다. 날 가지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런건 모르겠지? 히로 생일도 이제 곧이다. 여름 출생 아이는 강하다. 히로는 강하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오늘 밤에도.. 잘 자는지 들러봐야지.
음... ' ~' 겨울에 여름글 쓰려니 날씨생각도 안했는데 얘네 장마기간이라는 걸 글 쓰다가 생각이 들었.... 에잇 그런거 모르겠다(와장창)
마른장마가 계속 되다가 7월로 접어드는 순간, 무거운 공기는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에어컨 시스템 덕분에 상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름날은 몇일전의 비따위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탁상의 달력에는 생일이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었다. 7월 22일 금요일, 히로키 생일. 빨간색 동그라미가 정신없이 쳐져있고, 누가 붙인 스티커인지 하트가 몇개 붙어있고, 그리고 누가 쓴 글씨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화려하게 히로키 생일이라 적혀있었다. 달력을 멀찍이서 봐도 이 날이 무슨 크리스마스보다 더 특별한 날 처럼 보였다.
사실 히로의 상태는 지금 당장 퇴원해도 문제는 없었다. 퇴원하고 통원치료 해도 되지만 부모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고, 보호자랄까 감시자랄까, 하여간 그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이후로는 특별한 연락이 없었다. 퇴원일따위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돈에 문제없는 부유층들이 흔히하는 의료쇼핑보다 더한 게 요양차 침대에 누워있는 일이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병실에 여자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사는 물어봐야 될 것 같아서 퇴원일에 대한 상의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 일 이후로 종종 내쪽에서 전화를 거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히로가 자는지, 아니면 다른일에 집중하고 있는지, 혹은 자리를 비우고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통으로 거는 일은 없었고, 너스실에 한 번 전화를 해서 히로방으로 전화를 돌려주는 형태를 취했다.
[7병동 입니다.]
"타치바나 슈 입니다."
[아 쌤~ 쌤 쌤, 곧 있으면 마에다군 생일인데~ 서프라이즈 해줄까요? 할꺼죠?]
처음의 점잖음은 어디가고 바로 발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요시다상인가...
"제가 준비 다 해뒀어요."
[워호~]
"히로한테 전화할꺼니까 방해하지 마세요들~"
[그 날 저희는 바쁠 것 같은데요.]
"네? 그래요?"
나는 놀라서 바보같은 질문을 했지만, 눈치빠른 수간호사는 그 자리를 비워주는 거였다.
[꺄르르르~ 쌤 연애한대요♪♬]
"연애는 무슨. 혼자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네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수선생님의 목소리는 뭔가 좀.. 무서웠다.
"네, 매번 고맙습니다."
[에이~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팟팅팟팅!!]
"그런가요.. 히로는 지금 자요?"
[아뇨, 깨어 있어요.]
"그럼 전화 돌려주세요."
누가 뭐래도 저들은 내 조력자이고, 그리고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이다. 히로에게 있어서도 그렇고. 전화 연결음이 한참 들린다. 이 시간이 가장 초조한 시간이다. 히로가 자리에 있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혹여나 전화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래서 한 번 더 확인차 너스실에 전화를 해서 돌리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화를 받는 건 히로 그건 그의 자유의사다. 내가 싫으면, 전화를 받기 싫다면 받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여보세요.]
담담한 말투로 전화받는 히로.
"마에다군?"
[쌤~]
반갑게 전화를 받는 순간 안도한다. 전화를 받아준 그 자체로 행복하다.
"안잤네?"
[어. 말똥말똥한데?]
그렇게 말하며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히로를 떠올린다. 히로는 정말 예쁘고, 귀엽다.
"요즘 낮잠도 안자고 다 나았네. 퇴원해야 겠다."
[어어? ....그렇지.]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퇴원이란 말이 싫은건가. 나도 싫은데.
"그래서 그런데 다다음주 금요일에 약속있어?"
다다음주 금요일, 히로의 생일. 그 날 약속이 없다고 한다면 뭐든 해주고 싶다. 일부러 퇴원을 늦게 잡는 이유도 그런것이다.
[약속? 없는데?]
"어? 그래? 그럼 퇴원전에 나랑 잠깐 바람쐬러 갈까?"
[퇴원전에? .......좋아.]
"퇴원은 25일쯤으로 생각중인데, 어때? 부모님껜 그렇게 통보하면 될 것 같고"
[.... 그건 쌤이 결정하면 되는 거 아냐? 난 상관없어.]
퇴원이 불안한건지, 아까부터 목소리가 영 어둡다. 퇴원이야기는 그만해야겠다.
"그런가? ....뭐 불편한 거 없어?"
[응. 없어. 그나저나 디저트는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지난번 일 이후로 내가 종종 전화하면 히로는 불쑥 뭐가 먹고싶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내게 직접하게 되었다. 지금껏 사다준 것에 대한 불만도 없었지만 이게 먹고싶다 저게먹고싶다 하는 요구가 늘었다. 물론 나야 바라던 바이지만.
"아이스크림? 하겐다즈면 되지?"
[응!]
퇴원얘기할 때와는 사뭇다른 밝은 목소리. 아이스크림에 환호하는 거다.
"딴건 더 없고?"
얼른 가려고 차키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없어.]
"그래~ 금방 사갈게~"
[응.]
전화를 끊었다. 송수화기를 들고 있는 상태로 후크스위치를 누르고 전화를 정확하게 끊고는, 혼자서 송화부분에 뽀뽀했다. 히로가 알면 싫어하겠지만 히로와 전화를 끊고나면 매번 기도하듯 키스를 했다.
*****
날씨는 맑았다. 잠깐 비가내렸었는지 찌든듯한 느낌은 잠깐 소강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찜기에 올라가는 듯한 느낌. 몇년전부터 비오는 행태가 이미 소나기를 넘어선 스콜같이 내렸다. 여름의 찜통같은 더위는 자동차 안이 더했다. 그나마 다행인게 지하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었던 차량 내부온도는 외부에 주차된 차량보다는 사람이 들어갈만한 공간이었다. 에어컨을 켜고 바로 나가보면 답답했다. 숨쉬는 공기부터가 무겁고 먹기 싫은 공기를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를 가서 쇼핑센터의 고층 주차장 빌딩에 주차를 해놓고 아이스크림을 사러갔다. 여름시즌 한정으로 나온것도 챙겼다. 초코민트나 커피바닐라 같은 건 좋아할 것 같은데.. 레몬 진저는... 좋아하려나? 모르겠지만 일단 다 사고 보자 싶어서 챙기고 기본 초콜릿과 바닐라, 딸기와 쿠키앤크림은 파인트로 샀다. 양손 가득 아이스크림을 산 기분이 들지만 기분은 부족했다. 좀 더 많은 걸 주고 싶은데... 병실 냉동실이 얼만큼 꽉꽉 차있는지 생각지도 않고있는 슈는 미니컵으로만 대충 10개가 넘어보이는 봉투를 아이스패킹해서 차에 실어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하겐다즈네요~"
확연히 구분되는 무게와 부피의 아이스크림 두 봉투 중 적은쪽을 간호사들에게 건냈다. 인원은 저쪽이 더 많은데도 말이다.
"와아~ 잘 먹을게요 쌤♡"
"이건 히로꺼니까 잘 챙겨주세요. 히롤 퇴원스케줄이랑 해서 차트 확인해주세요."
"네네~"
묵직한 봉투는 히로꺼고, 1인 1컵에 파인트 2, 3개 더 들어있는 가벼운 쪽이 자기네들꺼라지만 그 사랑의 무게차이에 불만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얻어먹는 거니 말이다. 병동에 넘겨주고 내려오니 금새 전화가 왔다.
[잘먹었어.]
히로다.
"잘됐네. 맛있었어? 많이 녹진 않았고?"
[어, 괜찮았어.]
"응. 그래."
[고... 고마워.]
"뭐, 이런거가지고."
고맙다고 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바빴을텐데.]
"별로 안바빠."
안부인사는 좀 머슥했다. 딱히 할 말이 없달까..
"전화 끊자마자 비 내리더니 지금은 또 개었네."
[그러게. 날씨가 이상해.]
"뼈, 쑤신대는 없지?"
수화기 저편에서 배잡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히로가 웃는다.
[쌤은 무릎 아프고 그래?]
"부러졌던거 다시 붙여줬더니. 난 무릎 깨먹은 적 없는데?"
또 한참을 웃다가 말을 잇는다.
[딱히 쑤시거나 그런거 잘 모르겠어.]
"아직 젊네."
[안 어려. 다컸다고.]
무료하게 전화 받고 있다가 어른이라고 주장하는 아이의 모습은 멋지다. 귀엽기도 하고. 그리고 사랑스럽다.
"뭐가 안어려. 그게 다 큰거야?"
아직은 작은 키에, 그리고 작은 똘똘이가 생각났다. 좀 더 크려면 잘먹고 잘자야 되는데.
[다 컸지. 나 혼자서도 잘 지내.]
아이는 이맘때쯤 독립심이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특히 남자애들일 경우.
"그래. 아직 더 클 수 있겠더라."
[.... 씨.... 남의 키 가지고!]
키 이야기 한 거 아닌데. 뭐 그 쪽 이야기 하면 싫어할테니.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해야지.
[우유 많이 먹고 쑥쑥 클거거든?]
"들어올 때 보다 키 더 큰 거 알아?"
얼마전에 재검사 했을 때 키도 좀 더 컸고, 몸무게도 적당히 늘었다. 잘 먹인 보람이 있네. 하고 훈훈하게 검사 결과지를 보다가 든 생각이 엑스레이상에서 성장판이 아직 열려있는 거였다. 아직 잘먹고 잘자면 좀 더 클 수 있을건데. 지금 충분히 귀엽고 예쁘지만. 작은 거에 컴플렉스를 느낀다고 하면 잘자라고 권해줘야지. 그리고 밤에가서 키스해야지.
[....그래?]
몰랐다는 말이다. 물론 아직 성장기이고 다른쪽 재생에 힘쓴다고 키가 그만큼 자라는 걸 잘 못느꼈을 수도 있다.
"밤에 잠만 잘자도 쑥쑥 크니까. 게임 그만하고 자."
그리고 내가 밤에 키스하러 갈꺼니까 푹 자는거야.
[씨... 알았어. 잔소리는..]
"두 달 누워있는데 뼈도 붙고 키도 크고. 정말 성장기는 좋은때네."
[.......그래도 쌤보다는 작아.]
작은게, 컴플렉스인가. 그리 작은편도 아닌데...
"그 속도로 크면, 나보다 더 커질지도 모르지? 20cm?"
[진짜?]
혹하는 게 너무 귀엽다. 이렇게 넌 밤에 잠을자고, 난 밤손님으로 갈꺼니까, 울 애기는 코~ 자요~
"응. 오늘도 힘들었지? 재활한다고."
[어어. 그래도 전보다든 덜 힘들어.]
"여유가 있는데? 다 나아서 그런가."
[맨 처음에는 꿈쩍도 못했으니까. 그 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아.]
"근육도 어느정도 자리잡고 재위치 잡으니까. 아픈것도 덜하지?"
[어. 아프지는 않아.]
"진통제 뺐는데. 몰랐지?"
[진짜? 몰랐어... 언제 뺀거야?]
놀란 목소리. 귀엽다, 히로.
"한, 일주일? 많이 괜찮아졌다길래 뺐지."
재활치료사들이 보고해준 걸 토대로 괜찮아졌다고 해서 근육이완제며 진통소염제며 조금씩 약을 줄였다. 재활 초반에는 아무래도 안쓰던 근육들을 다시 쓰고 하다보니 근육이 경직되서 아팠던 것들이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았다. 큰 근육을 쓸 줄 알게 되고 어떻게 써야하는지 몸이 조금씩 익혀가고 그 몸이 단련되어 가는 게, 퇴원을 부추겼다.
[몰랐어... 그런 얘기 진, 진작에 해줬어야지.]
"진작에 얘기하면 뭐가 달라져?"
[....... 아니... 그래도...]
"왜?"
[...아냐. 낫고 있으니까. 상관 없어.]
"많이 나았어. 당장 퇴원해도 되는데."
안하려던 말을 꺼냈다. 히로 분위기가 뭔가 모르게 불안해보였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고, 내가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 거 같아서. 말을 내뱉고 하지 말걸 이란 후회도 했다. 한참 수다스럽다가 갑자기 말이 끊겼다. 전화기로 이어진 시간이 흐르고 있을 뿐, 둘에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다가 히로가 그 정적을 깨트렸다.
[당장 퇴원해도 되?]
"....퇴원하게?"
[.... 그래도 퇴원시키지 않는 이유가 있을거아냐.]
내가 보고 싶으니까.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집에가면 못보잖아.
[내 담당의사 쌤이니까. 하자는 대로 할게.]
"개인적인 욕심?"
사실대로 말했다. 히로가 결정할 일이니까. 약을 마음대로 감량한 것에 대해서도 조금 불만을 가진 모양이니까. 이야기 해야지. 내가 널 가둬두고 있는 거라고.
[어?]
"아냐, 답답하면 퇴원해."
[아냐. 괜찮아. 쌤 생각있을테고.. 집도 답답하고.]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같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이 있는 거잖아.
[아........]
"퇴원 하고 싶으면 얘기해."
[.....알았어.]
"일찍자고"
[알았어. 내가 쌤 키는 넘는다.]
"큭 그래. 쑥쑥커서 나보다 커져라."
[씨... 말 안해도 그럴꺼야!!]
"알았어~ 쑥쑥 잘 크게 고기반찬 많이 해줘야겠네~"
[자꾸 놀릴래? ....... 나 소고기.]
"소고기? 알았어. 또?"
[없어. 그거면 되.]
"저녁에 소고기 스테이크로 사올까? 한 400g 먹을래?"
내가 말하면서도 어의가 없어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나온다.
[와!!!!!! 먹을래 먹을래!!!]
한창 성장기라 그런지 고기에 대한 탐욕이 엄청났다. 금새 밝아지고 고기를 원했다.
"외출할... 사올게."
너무 좋아해서 같이 나가서 먹을까? 외출할래? 라고 말할 뻔 했다. 보고싶다. 우리 히로...
[.... 당장 안 사와도 되니까, 천천히 갔다와.]
"어, 응.."
그걸 들어버려서 서먹해졌다. 뭐라 마무리 지었는지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매번 하는 키스도 제대로 하질 않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쪽에서 보고싶다고 말을 하면 어떻게... 그래도 아직 저녁시간은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긴자에 종종 가던 스테이크 집에 예약전화를 했다. 포장한다는 말에 의아해했지만 준비해준다고 말했다. 고베산 고급 와규로 구워주는 곳이라 200g당 2만 3천엔 하는 곳이지만 코스로 먹으면 3만 4천엔 하는 곳이다. 그걸 고기만 구워서 간다는 것도 참 미안한 일이다. 다음에 퇴원하면 히로랑 먹으러 가야지 하고 찜해놓은 곳이긴 하지만.. 사이가 언제까지 좋을지는 사실 미지수이다.
그렇게 긴자에 나가서 스테이크를 포장 받아서 먹이고 어쩌다보니 수술을 들어가서 느즈막한 시간에 퇴근전에 차트를 열었다. 이미 불 끄고 잠들었다는 히로의 차트를 보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잔다고? 이 시간에? 평소 같았으면 아직 게임하고 놀 시간에 전화상으로 일찍 자라고 했더니 자고 있었다. 퇴근 전에 보물을 찾은 기분.
[자요?]
"네. 불 꺼져있던데요."
앞 뒤 잘라먹고 이야기 해도 알아듣는 간호사. 불만 꺼져있다고 자는 게 아닌거 알지만 간호사들은 랜턴을 들고 다니며 자는지 아닌지 확인까지 한다. 수면시간 체크도 그들을 일이다. 뭐 보통은 안하겠지만 히로는 전담 간호사들이 있을 정도니까.
'말 잘 듣는데?'
내심 기쁨이 발걸음에 나타났는지 뒤에서 뭐라고 하는 잔소리가 귓등으로 스쳤다. 티날정도로 하지 말라는 말은 지켜야 하지만 아무래도 히로의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면.. 안될꺼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자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가슴께에 손을 넣었다. 두근거리는 느낌. 그리고 살짝 벌린 입술은 먹어달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입안을 침범했다. 그 날 그랬던 것 처럼 여기까지 해야지 하면서도 더 원하게 된다. 맛보게 되면 입이 더 가고,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께를 벌려서 도드라진 부분에 입을 대었다. 새콤한 맛이라도 날 것 같지만 달콤함이 퍼졌다. 주변에 도장 찍으면 혼날꺼니까. 조심히 옷을 잠그고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여기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바지를 내렸다. 자고있는 페니스를 손으로 깨웠다. 히로의 입에서 '으음...'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깨진 않은 모양인지 음으... 하고 다시 잠에 드는 듯 했다. 귀여운 그곳은 조금 만지작 거리자 딱딱해졌다. 적당히 좋은 모양을 하고 있는 그것을 입에넣고 오믈거렸다. 주머니를 쓰다듬고 한창 열을올리고 있는데 부스럭, 히로가 깼다. 눈을 반쯤뜨고 맹- 하게 쳐다보는데 패닉상태가 몰려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주변이 핑 돌았다.
"쌤...? 키스...."
촛점이 제대로 맞는듯 하다가도 다시 잠에 빠졌다. 다행인건가? 괜찮은건가? 근데 왜 날 보고 이쪽은 더 반응하는거지? 키스 해달라는 말인가...?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가 키스를 했더니 아랫쪽이 더 커졌다. 혹여 주변에 튈까봐 콘돔을 씌우고 좀 더 자극했다. 키스를 하며 한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작 거리며 감싸쥔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거친 숨소리가 한참 되다가 원하는 게 흘러 나왔다. 콘돔안에 쭉쭉나온 흰 액체와 사그러드는 그 중심을 어루만지며 마무리를 했다. 마지막으로 키스 한 번 더하고.. 옷을 다 정리 해놓고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병실을 나왔다. 매일밤 이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만, 다음날이 사실 제일 두려웠다. 나쁜 짓을 해서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내일, 히로가 뭐라하지 않을까. 무서워서 잠이 오질 않았다. 또, 그 때처럼 화내고 하면...
*****
억지로 약을 먹고 잠든 듯 했다. 제대로 잠을 못자서 약을 먹었지만 제대로 못잤다. 뜬눈으로 침대에서 누워만 있었던 것 같은데 약을 먹은 탓인지 어지럼증과 두통이 더 심했다.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내가 해놓고 후회하는 것도 아닌 미움받을 짓을 해놓고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다.
[쌤, 나야.]
병동에서 오는 히로의 번호는 당연히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수화기 건너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먼저 전화가 온 것이다.
"아.. 마에다군.. 잘 잤어요?"
조금은 어색한 인삿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았다. 자고 있었으니까, 기억에 없을거야. 역한 냄새가 났다. 나 자신에게서.
[바빠?]
"아니 얘기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다를게 없으니까 티내지 말아야지. 난 어제 널 희롱했지만 넌 그걸 모르니까. 이렇게 자기정당화 하는 자신에게 구역질 나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내 자신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수면제 부작용인지 그런건 지금 중요하지 않지만.
[아- 어제 소고기 스테이크 잘... 먹었다고]
조금 쑥쓰러운 듯 말하는 히로는 분명 귀엽다. 그러고보니 어제 스테이크를 포장해서 들고와서 줬었구나. 갖고오느라 식었을지도 모르는 그 스테이크를 먹고도 맛있다고 해주었다. 다음엔 데리고 같이 가야지 라고 약속도 못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기뻤다.
"맛, 있었어?"
[응. 오늘 아침도 맛있었어. 푸딩, 쌤이 사준거지?]
"응, 푸딩... 출근길에 사왔지.."
아무래도 밤에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자고있었으니 당연한 거겠지.
[잘 먹었다고. 그냥... 인사하려고......]
전화를 하면서 사실 히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별 대단한 말을 하는 건 없지만 그저 고맙다는 인삿말일 뿐인데, 처음 건들였을때 소리치며 혐오하는 눈빛으로 쏴보는 히로가 떠올랐다. 전화로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닌데...
[.... 무슨 일 있어?]
"으응.. 아니.. 어제는.. 잘 잤어?"
말을 돌렸다. 아니 확인하는 말이다. 잘 잤는지, 자면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있었다. 분명 나는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에 잔 거 오랜만이야. 잠 안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잘 잤어. ....쌤이 키 큰다고 해서 한 번 해본거야.]
"중간에 깨거나, 하진 않고?"
[어, 그러지는 않았는데.]
"피곤하거나, 이상한 것도 없고?"
[....? 없는데?]
"..... 그래?"
나는 히로가 알기를 원하는지 모르길 원하는지 순간 불분명했다. 내가 보내는 일방적인 애정표현을 거절하지 않고 있는 히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희롱하는 나를 혐오하는 말을 던지지 않는 상황이.
[밤낮이 바뀌어서 그런가. 좀 피곤한데.]
"피곤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큰소리를 쳤다. 상대도 당황했는지 한참 말이 없더니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 뭐야. 나 아픈거야?]
환자에게 피곤하다고 소리쳐서 불안함을 야기하는 의사라니. 의사 실격이다. 정말 바보같다.
"아, 아니.. 밤낮이 왜 바껴?"
[게임....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있어서 그런가.]
"푹 잤다며?"
[응. 그동안 게임하느라 늦게... 잤는데 어제 일찍자서 그런지 잘 잤는데 좀 피곤해.]
기억은 못하지만 몸은 피로함을 느끼는 건가. 당연한거지만 혹여나 알까봐 계속 캐물었고, 그러면서 스스로의 죄악감은 흐려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바로 나올 준비를 하는건가? 히로의 전화를 끊을 때의 의식같은 전화 키스를 하고 수화기를 전화기에 올렸다.
반복되는 질문에 의심을 품는다.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게 얼마 안됐는데 보자고 불러내고. 이중적인 자기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머리가 아프다. 제대로 못잔 것도 한 몫을 할테고, 수면제 부작용도. 그리고 히로에 대한 죄책감도 모든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고 싶었다. 기왕이면 히로 품이라거나, 무릎베개를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겠다는 말도안되는 허상을 꾸면서.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망상은 계속 되었다. 망상속의 나는 히로와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함께 들어갔으며 둘이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먼저 일어나서 아침준비를 하는 내가 있었다. 그런 망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넌 왜 그렇게 애를 울려놓고 절교선언하듯 안본다고 한 상대에게 만나자고 하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러면서도 히로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일 밤 널 찾아갈거야. 라고 말을 건내고 있는 자신이 분열하고 있었다. 망상장애에 이어서 이젠 분열증까지.. 점점 늘어나는 정신병에 약은 '마에다 히로키'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병의 근원 역시 '마에다 히로키'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게 내쫓듯이 히로를 내 몰고는 한참을 멍하게 있었던 것 같다. 한낮의 해는 더 길어져서 지금시간이 되서는 창문을 통해 직사광선 같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눈이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거겠지. 왜 울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자신이 울고있다는 자각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울고 있는건가? 라는 묘한 괴리감과 현실과 분리된 상념에 빠져있을 때였다.
쿵쿵ㅡ
책상을 치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쌤, 병동에서요."
전화를 했던 것 같지만 아마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진료실로 들어온 모양이다. 병동에서 별일이 아니면 전화도 안하고 이렇게 까지 찾지는 않을텐데. 아마도 히로문제로 전화 온 모양이었다. 사실 그러고 보낸 뒤에 걱정이 되서 받고싶은 마음과 그렇게 보내서 받기싫은 마음이 공존했다. 좋지만 싫은 이 애매한 마음은 그래도 좋은 마음이 더 크고 걱정되는 마음이 더 들기 때문에 전화를 받았다.
귀가 따갑도록 병동 간호사들이 쨍알거렸다. 싸울 기력도 없었다.
[쌤! 마에다군한테 대체 뭐라고 한거에요?! 울 애기 침대에서 무릎세우고 울잖아요!]
언제부터 '울 애기'가 되었는지, 울고있다는 것에 내가 얼만큼의 책임을 져야하는건지. 그 외에 병풍같이 있는 간호사들이 한 입씩 덜어서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용은 '히로가 울고있다'라고 밖에 인식이 안되었다. 히로가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내쪽인데.
"난 할만큼 했어요. 난 잘못한 거 없어요."
냉정해졌다. 아니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았다. 한참 이탈되어 있으면서 마음을 식히고 뇌로만 글자로 받아들이고 그에대한 감정없이 '상대의 말'에 대한 대답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을 분리해서 감정적이지 않고 주관적인 상태가 아닌 객관적으로 자신과 히로의 관계를 관철하고 있었다.
[근데 애가 울어요? 아무것도 안했는데?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대화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기 싫다. 아무런 이야기도 아무런 상황도 이 상황이 도저히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나는 무기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히로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 정떨어졌다. 쓸모없는 놈.
"....저기요? 내가 갑인데요?"
입으로 내뱉으면서도 참 어이없고 쓸데없는 말을 했다. 간호사들도 그게 무슨 상관이고 그게 중요한거냐? 라는 말투로 상대했다.
[애가 물었다니까!! 얘기도 안해주고 몰래 울고있는데!! 갑이 중요해?! 애 울려놓고!!]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포기했다. 히로를 이렇게 포기하는 게 나을거란 생각을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대체 뭐라고 하셨는데요? 마에다군은 그런 얘기도 안해주고.. 몰래 울기만 하고.."
상대가 어느정도의 냉정을 찾은 듯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히로 전담 간호사들이 열을 내고 있었고, 수간호사가 상황정리를 하고 냉정하게 묻기 시작했다.
"그냥.. 보러 왔길래, 볼꺼면..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오라고.. 나도 보는 게 마냥 편하진 않아서.."
도움을 받아서 관계에 개선의 여지가 있는걸까? 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걸어보았다.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그에대한 피드백이 왔다.
[....선생님이 잘못했네요. 애를 왜 내쫓아요.]
"내가.. 대체.. 뭘.. 오지 말라고는 안했어요."
난 잘못 없다로 발뺌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난 너무 잘 알고 있다.
[볼거면 각오하라는 게 오지말라는 소리 아니에요?]
잔소리가 2배가 되서 돌아왔다. 전화로만 하다가 만나겠다고 찾아온 애를 쫓아보냈다느니 부터 시작해서 용기를 내서 만나러 간 애를 그렇게 오지 말라고 내쫓았냐는 말까지.
"올꺼면.. 싫은 내색은, 안해야지"
[일단 간 게 중요하죠. 가서 선생님과 얘기 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되지도 않고. 볼거면 각오 하라느니, 각오하고 간 애한테]
"얘기는 전화로 해도 되잖아요. 이마에 뽀뽀하는 정도로 그렇게 싫은티를 낼꺼면.."
각오하고, 온건가? 무슨 각오를 한거지.. 내가 막 건들여도 상관 없다는 그런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아닌가? 좀 싫은티는 냈지만.. 그래도 안아도 된다고 했고, 키스하는 데 찡그리긴 했지만 밀쳐내지도 않았고..
[근데 직접 갔다면서요. 마에다군이 선생님과 얼굴보며 얘기하고 싶으니까 그런거 아녜요? 선생님 말씀대로 얘기는 전화로 해도 되는데..]
단순하게 싫어서 책임감없이 회피하고 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꺄~ 이마에 츄 하셨어요?!]
"네, 이마츄 했는데 송충이 본 눈빛이면 나도 견딜 수 없네요. 그래서 내쫓았어요. 됐어요?!"
하고 심퉁난 목소리로 내가 되려 소리치고 있었다. 당근먹은 표정 아니라서 내가 절해야 되는거야? 그럼 피망먹은 표정까지는 괜찮은거냐고. 당근아니면 된거냐고? 라고 마음속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통화는 계속되었다.
[저렇게 쪼잔해지다니..]
"쪼잔해서 미안하네요.."
있는 힘껏 삐뚤어진 목소리로 말을 했더니 상대방도 말실수 했던건지 '헙'하는 입막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이쁜데 뽀뽀도 하지 말라니.. 오지 말라고.. 칫.. 전화해도 원하는 거 다 들어준다니까.."
[...... 쌤.....?]
"....... 히로?"
전화기 저쪽 상황이 갑자기 찬물끼얹듯 조용해졌다. 아니, 갑자기 조용해지고 히로키의 목소리가 들린듯했다. 히로가 받은건가? 아니면, 환청인가? 계속 조용했지만 설마 히로가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환청이라고 일관하고 싶었다.
"마에다군? 잘못들었나.. 요즘 히로 환청이 들리는 건가.. 적당히 좋아하기도 이미 글렀으니까, 히로 우는 거 서포트 좀 해줘요."
[씨.......]
흠칫. 간호사들이 쫑알대는 말도 안들리고, 히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참.. 많이 미쳤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칫,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암껏도 없네. 뭐 달라는 거 좀 챙겨주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줘요."
[씨발... 그럴거면 차라리 신경쓰지마!!!!]
"히로?? 마에다군? 마에다군?????"
전화가 끊긴 소리가 뚜- 뚜- 하고 들릴 뿐이었다. 히로가 맞았는데 아니라고 계속 부정하던 나는 죽었다. 그리고 그게 히로가 맞다고 하던 내가 움직였다.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와줬는데, 난 그런 히로의 걸음마를 밀어냈다. 힘들게 걸어와줬는데. 사고난 이후로 어린나이에 한참을 누워 있다가 재활치료를 하면서 겨우 앉아있고 겨우 걷고 힘들게 돌아다닐 수 있는 지금에야 되서 내게 다가와줬는데 난 그런 히로를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 밀어내고 있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계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와줬는데 내가 밀어내서 미안해.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너스 스테이션을 무시하고 바로 히로 병실로 뛰어들어갔다.
무릎을 끌어안고 울고있는 모습, 그 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웅크리고 가리고 있었다.
"마에다군?"
살아는 있는지, 석고상 같은 느낌도 들고, 죽은자의 방에 흰 천을 뒤집어 씌운듯한 그런 느낌도 들었다. 이 세계엔 더이상 없는 존재. 너와 나는 다른 공간의 존재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됐어요, 누나."
거절의 말. 내가 싫겠지. 마음의 방황을 접고 겨우 찾아갔더니 쫓아내기나 하는 나따위.
"미안."
"가세요. 저 잘게요."
그게 뭐였건 끌어안았다. 히로든, 석고상이든, 천을 뒤집어씌운 가구든. 그냥 내 마음의 위로를 하려고.
"....쌤?"
"내 맘대로 좋아하고,"
"......씨발 꺼져.."
"..... 미안..."
눈앞이 흐려졌다. 아마도 울고있는 거겠지. 콧등으로 흐르는 물은 내가 울고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려줬다. 눈물 때문에 막혀서 코를 훌쩍거렸다.
"잘해주질 말던가 짜증나게.."
내가 울고있는 걸 알았는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자연스레 내가 끌어안고 있던 히로는 내 품에서 벗어났다. 이불만 애처롭게 끌어안고 울고 있는 나와, 어른이 이런일로 우느냐는 듯 당황한 듯 쳐다보는 히로가 있는 병실은 정적이 흘렀다. 서럽게 울면서 '미안' 하다는 말을 자그맣게 흘리며 훌쩍이고 있으며 우는 것 조차 미안해서 끅끅 거리며 소리죽여서 울고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뭘 잘했다고 우냐고 하는 엄마의 말이 더 슬프게 만들었다. 이불을 끌어안고 우는 얼굴을 안보이게 가리고 싶었다.
"좋아해서.. 미안해.."
이제 마지막이니까 꼭 하고 싶은 말은 전하고 싶었다.
"이제, 안괴롭힐게..."
숨을 죽이며 우는 소리 나지 않게, 내가 울고있는게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볼을 쓰다듬는 느낌도 들었다. 잘해주는 것도 괴롭히는 거라고 했으니까.... 이제 마지막. 진짜 마지막. 마지막으로 히로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포기해야지. 눈을 꼭 감고 눈물을 짜내고 히로를 쳐다봤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있는 힘껏 울음을 참으며 눈물을 삼켰지만 계속 눈물이 흘렀다. 뭐라고 달래는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내가 듣고 싶지 않는 것 뿐이겠지만 그냥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히로와 마지막이라고 정했는데, 눈물 사이로 보이는 히로는 너무 예쁘다.
그러다가 히로가 꼭 껴안아준다. 다시 제정신이 드는 모양인지 뭐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전화할걸"
"전화? 전화.. 해도 되?"
전화, 해도 되는건가? 히로랑 마지막 아니어도 되는건가? 잘해주거나 괴롭히거나 그런 거 말고 전화는 해도 되는건가.
내가, 전화해도 되는건가? 매일 히로 전화 기다리기만 하고 내가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괜히 내가 전화했다가 불쾌해할까봐 전화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전화해도 된다고 한다.
"헤헤.. 전화해.."
마주 끌어안으며 히로가 전화하란 말이 좋아서 마주 끌어안았다. 방금까지 울던 아저씨가 끌어안고 전화해도 된다는 말에 울다가 웃으니.. 히로가 보기엔 난 정말 어처구니 없는 아저씨로 보이겠다.
그래도 기뻤다. 포기하지 않아도 되구나. 전화해도 된다는 말은, 받아준다는 말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입술끝에 맺히다가 히로의 입으로 다가갔다. 키스, 받아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밀어내진 않았다. 싫어하는 표정은 사실 눈물에 번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끌어안고 어루만지며 하는 딥키스에 당황한 몸은 확실히 뻣뻣했다. 싫지만, 싫은티를 최대한 나지않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키스도 받아준거니까, 괜찮은거겠지? 맛있는 키스를 정리하고 아쉽게 입을 떼며 쪽하고 소리를 냈다. 품에있는 게 히로가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히로다, 히로랑 키스했지만 품에있는 히로는 날 밀쳐내지 않는다. 그 기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게 중요하지 않았다.